어쩌다 보니 100번째 브런치 글
99라는 숫자를 보면서 어떻게 100번째 글을 써야 할까. 누구도 관심이 없을 작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내 브런치의 시작이 되었던 이탈리아 골목길 이야기를 하나 더 써볼까?
이사 온 뒤로 취미는 생겼으나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아내의 화초 이야기를 써볼까?
그러다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유는 그냥 100번째니까.
방목형으로 키우다 보니 아이는 하루하루가 즐거운 대신 살아가는데 긴장감이 전혀 없다. MBTI 검사를 하면 첫 글자가 ‘I’로 시작되는 아이인데, 이번에 입학한 고등학교에서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입학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교실로 귀엽게 생긴 선배 언니들이 들어오더니 자기들은 이번에 전교 회장, 부회장 선거에 입후보할 예정이라며 1학년 부회장이 될 파트너를 찾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지원해 달라고 했단다.
다른 반으로 가려는 선배 언니들에게 냉큼 쫓아가서 자기 그거 하고 싶다고 하고 왔단다.
원래 이 녀석이 이런 거에 관심이 있었나 고개가 갸웃거리긴 했지만 누구나 가끔씩 충동적이 될 수 있으니 그런가 보다 넘겼다.
귀여운 언니들의 계획은 1학년 전체 반을 돌면서 직접 공지를 하고 후보자를 가급적 많이 받아보려고 했단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2번째 반까지만 가서 홍보를 하고 그만두었단다.(선거 끝나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살짝 귀찮아졌을까? 두 반에서만 홍보한 것으로 이미 원하는 목표가 달성되어서였을까? 아무튼 딸랑 두 명의 지원자를 받아 두곤 그걸로 끝! (귀엽지 않은가? )
2:1이라는 어마무시한 경쟁을 뚫고 드디어 부회장 후보가 되었다. 한동안은 선거 운동하는 이야기였다. 홍보에 쓸 피켓을 얼마나 깔끔하게 잘 만들었는지. 선거 운동을 도와줄 친구들을 어떻게 섭외했는지(아니, 이 동네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그게 어려운 일일까? )
우리 집 아파트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학교 정문이 보인다(그렇다. 말 그대로 학교가 코앞에 있다). 하루는 아침부터 밖이 시끌벅적해서 내려다보니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정문 출구에 양쪽으로 서서 자기들을 지지해 달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아하, 며칠동안은 아침마다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겠구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달랑 하루 만에 조용해졌다. 딸아이에게 물어보니 시끄럽다고 소리 내서 선거운동 하지 말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어른들 선거는 확성기까지 동원해서 자기들보다 훨씬 시끄러운데라며 볼멘소리이다. 어른들을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우리도 쫌 조용하게 선거운동하자!)
어느 날은 밤잠도 줄여가면서 토론회 준비를 하고 있다. 자기 공약의 홍보도 중요하지만 상대방 공약의 허점도 찾아야 한다며 열심이다.(에휴, 공부도 좀 그렇게 해봐라!) 이렇게 한 주가 지나고 드디어 투표일이 되었다. 퇴근해서 결과가 어찌 되었나 물었더니 아직 모른단다.
“엥. 왜? 딸랑 오백 명도 안되면서 그게 시간이 걸릴 일인가?”
투표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되어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 중이란다.
“아니, 일이 이렇게 되면 선거관리를 담당했던 쌤들이 늦게까지 남아서 결론을 지어줘야 하는 거 아냐? 다섯 시 되었다고 모두 퇴근해 버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한대. 아빠, 이게 말이 돼?”
원래 직장인의 미덕은 ‘칼퇴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 모든 사단은 역시 코로나에서 기인한다. 코로나 확진으로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온라인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했는데(굳이 이렇게 까지...) 실수로 학교로 등교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투표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이중투표라니!!!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암튼 현존하는 최첨단 수사기법(아마도 탐문조사)을 동원해서 이틀 동안 전수조사를 해서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아니 굳이 이렇게까지...)
이렇게 파란만장 선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고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춘기가 벌써 끝나 가는 건지 아니면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건지 조금 달라졌다. 방문을 닫아걸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거실에서 부엌에서 재잘거리는 것도 늘었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만 아니면 뭐든지 오케이이다.
연속극 몰아보기에 빠진 아이 엄마가 딸아이에게 묻는다.
“만난 지 삼 개월 만에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져서 마음이 아파하는 게 이해가 가니?”
“겨우 삼 개월에 무슨. 적어도 일 년은 사귀어서 일상에 스며들어야 헤어지면 슬플걸”
아니, 모솔 주제에 뭘 안다고... 어이가 없다.
일요일 오랜만에 맘에 드는 사진을 구해두고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슬쩍 다가오더니 자기가 색을 입혀도 되냐고 묻는다.
“당연히 되지”
주섬주섬 수채 물감을 챙겨 오더니 다시 한번 다짐을 받는다.
“내가 칠하고 싶은 색으로 해도 되지. 아빠가 칠하는 색은 구려”
원본 사진에 상관없이 아이는 열심히 원하는 색을 올리고 있다.
아이 엄마는 옆에서 감탄(?) 중이시다. 아이가 무얼 하던지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시다.
요기까지 그리고 있었는데...
억... 노란색이라니..
혼자서 꽤 만족해하고 있다.
게다가 바닥은 핑크색.
원래 사진은 이랬다.
사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화사한 색감이 나도 마음에 몹시 들었다.
미술심리는 잘 모르지만 아이 마음이 밝아서 이런 색을 쓰는 거겠지라며 마음이 놓인다.
며칠 뒤 아이와의 콜라보 작업이 즐거워서 한 장의 스케치를 더 해놓고 넌지시 색깔 한 번 더 입혀볼까 하고 묻는다.
“아이고 오늘은 바빠서 아빠랑 놀아 줄 시간이 없네요”
아니 쫌... 같이 놀아 달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