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 배우 에세이- 마누스
책을 읽는 내내 조금은 불안하고 조금은 갑갑했다. 아마도 위태로움을 느껴서였을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택하는 순간 어쩔 도리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시간들을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순간들을 감내했는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책을 들여다보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가 있을 수 있고, 무료한 시간에 지적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고상한 이유도 있고,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간접경험을 해보려는 이유도 있다.
<배우의 목소리>는 세 번째 이유에 충실하다. 불안정한 생활패턴, 들쑥날쑥한 수입원,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혹시나 하는 전화벨소리, 주변의 시선. 우울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힘든 시간들이다. '존버'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고 그 기회를 잡게 되면 탄탄대로의 배우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현실을 보면 좌절할 법도 한데, 이 배우 대단하다.
우울증 약을 먹어가면서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냥 버티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펴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의 치유효과를 이야기한다. 이 배우도 한 꼭지를 글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타입이라고 했다. 말을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리로 새고 저리로 새고 헛소리가 되어 간다고 했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마음속에 보따리처럼 커져서 무거워진다고 했다.
우리 집 홍여사가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한 시간 정도는 재잘거린다. 요사이는 아이 때문에 속 썩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는 듣는 둥 마는 둥하다가 적당히 추임새를 넣고 듣는 척을 한다. 홍여사도 내가 심각하게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떠들고 나야 후련해진다고 하니 그냥 들어준다.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쌓이면 '암덩어리'가 된다는 것이 홍여사의 지론이다. 아내의 말이 길어지면 나는 그림도구를 꺼내 들고 스케치를 시작한다. 이게 루틴이 되다 보니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날은 아내에게 말을 건다. 아내의 말소리가 BGM이 되는 순간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이야기들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한참뒤에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내가 이런 걸 썼다구'하는 것들이 있다. 심각해 보였던 이야기가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었나 보다. 아마도 연지 배우님도 같은 기분이었을 듯하다. 나쁜 기억이라도 끄집어내어 요리조리 살펴보고 먼지는 조금 털어내고 어떨 때는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놓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 기억들은 더 이상 '나쁜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큰 챕터를 <뒤로 감기>, <일시정지>, <10초 건너뛰기>, <PLAY>로 나누어 놓았다. 전반부는 불안했지만 마지막은 그래도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희망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고 최선을 다해 오디션을 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뭐 어때서?' 또는 '까짓 거 뭐!'라는 기분으로 내려놓은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미소마저 든다. 덜 후회하기 위하여 '한번 더 해보겠다는 용기 또는 민폐'를 보면서 '응원'을 보낸다. 하지 않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야기해보고 거절당하는 것이 백배는 좋다는 것이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나쁜 기억' 또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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