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데, 이런 이상한 이름의 북클럽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2차 대전 독일군에 점령당했던 영국의 작은 섬, 건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시작은 이렇다. 주인공인 줄리엣은 작가다. 얼마 전 출간한 소설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아서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책 사인회도 다니면서 열심히 책을 팔고 있다.(부럽다) 작가가 책을 팔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책을 팔아야 하나 글을 써야 하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책을 파는 일에 지쳐있던 때에 건지섬에서 편지 한 장이 날아온다. 예전에 줄리엣이 헌책방에서 일할 때 팔아치운 책이 건지섬까지 흘러들어 갔나 보다. 헌책방이란 말이 중고서점이란 말보다 친근감이 간다. 예전에 헌책방에 가면 그냥 플라스틱 노끈에 포박당한 채 덩어리로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책들이 떠오른다. 먼지가 폴폴 나는 곳에서 책을 찾아보는 일도 그렇고 책방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책의 가격을 흥정하고 그랬겠지. 예전에 책을 사면 흔적을 남겨놓기도 했다. 간단하게는 언제 어디서 책을 샀는지를 내지에 써놓기도 하고, 읽는 중간에 간단한 메모도 남겨두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즈음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두지 않는다. 중고 서점에서 싫어하기 때문이다. 책을 한번 만들어 본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건대, 이사를 할 적마다 중고서점에 꽤 많은 책을 넘기곤 했다.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책장의 물리적 공간은 정해져 있고(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힘이 없다), 책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주인공, 줄리엣은 나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정보를 남겨놓았는가 보다. 런던의 어디에 사는 줄리엣이라고 남겨 놓았는지 기특하게도 편지가 찾아온다. 더 웃기는 건 남겨둔 주소의 집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는데도 찾아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중 나치 독일은 V2 로켓을 런던으로 수없이 날려 보냈다.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공습으로 영국의 전쟁의지를 꺾으려고 한 짓이지만 런던사람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한밤중 로켓의 공습으로 옆동네 또는 옆집이 파괴되는 일을 겪으면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는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아이들을 모두 낯선 시골에 보내놓고 어른들은 런던을 지켜냈다.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국의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꽤 흔하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들의 심정은 또 어떻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별이었지만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마치 소풍을 보내는 것처럼 보냈을 테지.
그 당시에는 우편물을 전달하는 우체부도 뜨내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동네 지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테고 당연히 그 집에 누가 살고 있었는지도 알았겠지. 그러니 공습으로 사라져 버린 주소로 날아온 편지도 제대로 수취인에게 전달했을 테고… 도시 애덤스라는 건지 사람이 찰스 램의 다른 책들도 구해 줄 수 있냐는 편지를 줄리엣에게 보내면서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 찰스 램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혹시 청소년판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은 분인지 모르겠다. 어른들에게도 어려운 말로 가득한 셰익스피어 희곡을 청소년용 소설로 각색하신 분이시다. 나두 찰스램판으로 읽어서 셰익스피어가 소설가인줄 알았다.
아무튼, 건지 사람들이 독일군 점령하에서 겪은 일들은 줄리엣의 작가 본능을 자극하게 되고 청혼자도 버려두고 기어이 건지섬으로 들어간다. 책을 홍보하러 다니던 일에 신물이 난 것도 있겠지만, 정성 들여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건지 사람들이 더 보고 싶었던 거지. 그다음은… 직접 읽어보세요. 계속 설명하려니 귀찮아졌다.
수채화 같은 그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좋아할 만하다. 원래 책이란 건 누가 권해서 읽는 것보다 딱 꽂혀야 읽지 않나. 아니 나만 그런가. 서점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똑같은 책이 있다. 이래도 나를 사지 않을 거야 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형상이다. 그야말로 초대형 베스트셀러. 부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질투심에 부글부글 거려서 절대 사서 보지 않는다. 아, 예외도 있다. 김훈 선생의 책은 가끔 사서 본다. 안 읽기엔 너무 아깝다.
<잠깐 광고>
얼마 전 출간한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산책>은 이제 평대에서 보다 서가에서 찾기 쉬워졌습니다. 서가 구석구석을 잘 찾아봐야 겨우 보입니다. 으으으, 베스트셀러 작가들. 부럽다 부러워.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하여 사족을 붙이자면 이 소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책을 읽는 것은 되도록 멀리 하고 싶은 분이거나(그런 분이 브런치를 기웃거릴리는 없지만), 책과 영화 중에 고르라면 영화를 택하는 분들은 넷플릭스 같은 곳을 찾아보면 된다. 나도 책보다는 영화로 먼저 봤다. 릴리 제임스라는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인데, 남자주인공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맘마미아 2>에서 메릴스트립의 젊은 시절 연기도 했고, <베이비드라이버>에서는 웨이트리스 역을 맡았던 매력적인 배우다. <예스터데이>에서는 비틀스가 사라져 버린 세계에서 비틀스를 기억하고 있는 무명가수를 짝사랑하는 선생님이자 매니저로 나오기도 했다.
이제 눈치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은근하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아래 등장인물 중에 이솔라라는 건지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가 좀 눈치가 없다.
줄리엣 애슈턴 - 런던사람, 주인공
도시 애덤스 - 건지사람
시드니 - 출판사 사장, 친구(소피)의 오빠
마컴 레이놀즈- 미국인 사업가
엘리자베스 - 화가이자 간호사, 나중에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됨
애번 램지 - 건지 사람
아멜리아 - 건지 사람. 킷의 양육인
레미 - 프랑스 여자, 엘리자베스의 마지막을 함께한 친구, 도시 애덤스가 알뜰하게 챙긴다.
이솔라- 건지 사람. 줄리엣과 친구가 됨. 눈치 없는 친구. 미스마플 흉내내기
킷- 엘리자베스가 독일군장교 사이에 낳은 아들
빌리 비-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편지를 훔치러 온 경쟁사 스파이
이솔라는 건지섬의 미스 마플이 되고 싶었지만, 이솔라가 미스 마플과 다른 점은 '답을 정해 놓고' 증거를 찾으려는데 있다. 그러니 그렇게 중요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지. 확증편향에 빠지면 그렇다. 모든 명백한 증거는 모두 외면한 채 외눈박이가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다. 이솔라의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고 재미있는 일만 벌이고 있지만 현실세계의 많은 확증편향자들은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가끔은 나를 의심하게 하는 행동을 한다. 며칠전만 해도 살살 거짓말을 하는 우리 집 꼬맹이에게 확증편향자와 같은 말을 해서 아내에게 빈축을 샀다. 나의 인생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싶다면 만날 때마다 확증편향자와 같은 행동을 하면 된다. 행동에 이런 말투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이다.
'아 그거 아냐. 내가 해봐서 아는데...',
'야, 안 봐도 뻔하다. 니가 하는 일이 그렇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대개 확증편향자들은 눈치도 없다. 권력의 정점에 갈수록 이 증상이 심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예외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그냥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권력자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달콤한 말을 해줄 간신배들은 언제나 세상에 넘쳐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오늘도 여기로 흘러들어온 거지?
나는 이게 문제야. 밸런스가 맞지를 않아. 책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면 그거나 열심히 할 것이지. 암튼 영화든 책이든 잘 살펴보면 '확증편향자'들이 나오는데 예외 없이 빌런이야. 히틀러, 스탈린, 트럼프, 푸틴 그리고 타노스. 몇 사람 더 넣고 싶은데, 나도 요즈음 '자가검열 중'이라서 차마 쓸 수는 없네.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는데, 내 눈엔 왜 이렇게 확증편향자가 많이 보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