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도보여행 - 3
도보 2일 차 산퀴리코도르차-피엔차-몬티키에로-몬테풀차노
여행의 즐거움은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온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새벽 6시.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에 더 강한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서 아침식사도 건너뛰고 새벽부터 도보를 시작한다. 도보시작 20분 만에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때마침 포장도로도 끝나고 이제부터는 오솔길이다.
어젯밤 내린 비로 풀로 덮여 있지 않는 부분은 이미 진흙길이 되었다. 마른풀과 나뭇잎이 진흙을 만나서인가 진흙만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달라붙고 떨어지지 않는다. 몇 번 발을 구르면서 걷다가 어느 순간 포기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진흙 총량’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로 미끄러워진 내리막길에서는 넘어지지 않으려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 걸어간다. 어제보다 걷는 길이 두 배는 더 힘든 것 같다. 이제 오르막이다. 오르막의 끝에 작은 예배당이 보인다.
<예배당>
비 오는 날 이런 외진 곳에서 사람들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작은 성당 주변에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 가득하다.(그래봤자 겨우 10여 명) 도대체 무얼 찍고 있는 것일까. 같은 방향에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들판 가득히 물에 젖은 초록뿐이다. 사진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고개만 갸우뚱하고 돌아선다. 조금 더 길을 가니 무리에서 떨어져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방향이 딱 조그마한 성당이다.
“파를라 잉글레세, 영어 할 줄 알아?”
“씨, 그래“
“엥, 토스카나 사람 아니구나?“
“아니지. 어찌 알았어? 표시가 나?”
“아니, 냄새가 달라”
깔깔 웃으며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꼬레아수드. 꼬레아라고 하면 늘 노드? 수드? 묻는 통에 아예 꼬레아수드라고 답해준다.
“새벽부터 어딜 가고 있니?”
“나, 토스카나 도보여행 중이고 오늘 피엔차를 거쳐서 몬테풀차노까지 갈 거야.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 조그만 예배당이 의미가 있는 곳이야? 예배당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길래.”
“아니, 나도 그건 잘 몰라. 그냥 평범한 예배당일걸. 초록들판에 혼자 있는 예배당이 내 사진의 포인트가 될까 싶어 찍고 있는 거야”
“내가 네 사진을 찍어도 될까?”
“아니 안돼, 여기 오느라고 새벽 4시에 일어났어. 화장도 세수도 제대로 못했는 걸”
“그래, 그럼 찍지 않을게. 근데 그거 알아. 넌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예뻐. but you know, you are the most beautiful woman ever I met”
조금 뜸을 들인 후…
“오늘 만난, today”
깔깔깔 웃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로 예뻤다. 그녀의 뒷모습만 사진에 담고 다시 갈 길을 간다. 확실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재개그를 좋아한다는 느낌이다.
갈림길이다. 다시 내리막이다. 갈림길에 서 있는 폐가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이렇게 전망이 좋은 곳을 버려두고 떠났다면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간 것일까. 토스카나를 걷다 보면 이런 버려진 집들이 가끔 보인다. 사람의 손길이 사라지면서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풍경이 비에 젖어서 그런가 조금 더 슬퍼 보인다.
<허물어져 가는 집. 자비에르 할아버지 말로는 한때 근사한 식당이었다고 함>
첫 번째 목적지인 피엔차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여전히 진흙은 자석처럼 땅에 붙어서 발을 끌어당기고 있다. 조그마하고 예쁜 집이 보인다.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까. 그냥 집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혹시 개라도 뛰어올까 싶어 엉거주춤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다. 멀리서 봐선 부엌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주인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앗, 영어다)?”
“집이 너무 예뻐서요. 밖에서 구경을 좀 하고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그럼 되고말고. 집구경 온 사람도 네가 처음은 아니야. 이 집 팔 생각이 있으면 자기한테 연락해 달라고 메모까지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는걸”
집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시다.
“어디서 왔나?”
“수드꼬레아”
“근데, 아침은 먹었냐?”
“아니요, 아직 못 먹었는데요”
당신도 지금 아침을 먹으려고 한다면서 들어와서 같이 먹자고 하신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을 집에 들여서 같이 밥을 먹는다고요. 제가 나쁜 놈이면 어쩌시려구요.(마음의 소리)
“감사합니다. 마침 배가 고파와서 피엔차에 가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거든요.”
진흙으로 더러워진 신발을 신고 부엌으로 들어갈 순 없는 일. 비를 맞지 않도록 처마밑에 벗어두고 맨발로 부엌으로 들어간다. 괜찮다고 신고 들어와도 된다고 하셨지만 그럴 수 없지.
“아침 식사 준비하는 동안 따끈한 차라도 먼저 할 텐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뒤뜰로 나가시더니 페퍼민트를 한 줌 뜯어오신다. 끓여 놓은 물에 대충 툭툭 끊어서 넣으시곤 향과 색이 배어 나올 때까지 물끄러미 쳐다보신다. 이 모든 작업이 마치 롱테이크의 영화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현실감이 떨어진다.
‘나 지금 여기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찍고 있냐?’
내어 주신 페퍼민트 차는 그 신선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를 맞으면서 걸어온 나에게 따뜻한 차는 그야말로 신선이 마실 법한 천상의 음료였다.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 그리고 아까 뜯어오고 남은 페퍼민트, 올리브오일, 약간의 후추. 이 대목에서 나를 쳐다보더니 “후추 괜찮지?” 하는 표정이시다. 나는 엄지 척.
치즈 몇 덩어리와 빵, 카프레제와 페퍼민트 차. 완벽한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비현실적이었던 아침식사>
아침을 먹고 나니 집구경을 시켜주신단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 지역 괴테연구소(독일문화원 정도인 거 같다)의 매니저로 일을 하셨다고 한다.(원래 독일분이시다) 극동 지역으로 가본 적은 없지만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하신다. 1층 거실의 한쪽 벽은 완전히 책으로 가득하다. 책 읽기를 게을리하시는 분은 확실히 아니다. 거실의 장식품들은 아시아 냄새가 난다. 문고리 하나를 쓰다듬으시면서 잠깐 옛날 생각에 잠긴 눈치이시다.
부엌에 있는 그림 한 점은 따님이 그린 그림이라고 하신다.
“자네, 그림형제의 동화를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돼요”
그림형제의 동화중에 하늘에서 금화를 받는 소녀의 이야기가 있다고 하신다. 그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서 인도의 소녀가 금으로 만들어진 온갖 곡식을 받는 것으로 바꾸었다며 따님의 솜씨를 자랑하신다. 게다가 직업은 의사라며 이것도 자랑하신다.(자식 자랑하는 것을 보면 역시 사람은 다 똑같다)
“얼마나 좋으세요. 따님이 그렇게 재능이 있고, 밸런스가 잘 된 삶을 살고 계시다니. 축하드릴 일이 틀림없어요” (밥값은 했습니다. ㅎㅎ)
30년 전쯤 이탈리아가 좋아져서 가족들은 독일에 두고 혼자서 이 집에 가꾸고 계시단다. 구매했을 당시 사진을 보여주시는데,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집에 공을 들이고 계신지 알 수 있다. 확실히 독일 중산층의 삶이라는 게 우리와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좋은 집, 좋은 차, 돈보다는 삶과 일이 밸런스를 이루고, 지나친 욕심은 자제하고, 자기 인생에 만족하고, 좋은 취미를 가지며 슬쩍 힘을 빼고 사는 그런 삶.
겨울이 되면 가족이 있는 독일로 돌아갔다가 봄이 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더블 라이프가 아주 좋다고 하신다. 뒤뜰에는 각종 채소뿐 아니라 올리브나무도 키우고 계신다. 몇 그루나 되냐 여쭤보니 170그루쯤 되고 연간 150리터의 오일을 만들어 낸다고 하신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일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고 하신다. 아내분과 떨어져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여쭤보니 아내도 일이 있고 나도 일이 있어서 젊을 때에도 완전히 같이 살고 있지는 않았다고 하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사는 것이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인지 모른다고 하시며 빙그레 웃으신다. (어제 만난 호주할매랑 똑같은 소리를 하시네. 이쯤이면 나도 세컨드 하우스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곳에서 하도 오래 살아서 반은 독일인, 반은 이탈리아인이 되었다면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모르는 사람에게 늘 이렇게 친절을 베푸시냐고 여쭈어보니, 자기가 베푸는 친절은 당연한 거라고 하신다. 자기도 여행 중에 매번 이런 친절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나는 너에게, 너는 또 다른 누구에게 친절을 베풀며 살아야지, 그래야 HOMO라는 말을 우리 앞에 쓸 수 있다며 인류애를 강조하신다.
<토스카나에서 만난 산타>
고양이도 있다. 성질이 반은 도메스틱, 반은 와일드라고 하신다. 여름에 당신이 집을 비우실 때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와일드하지만, 겨울에는 아무래도 먹을 걸 주어야 하기 때문에, 옆집(이라고 해도 차로 10분 거리)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들려서 먹을 것을 두고 간다고 하신다.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고양이라서 좋다고 하신다.
“이제 아침도 먹고 집구경도 끝났으니 뭐 할 거야?”
“피엔차를 거쳐 몬티키에로와 몬테풀차노까지 걸어갈 거예요.”
“나도 마침 피엔차에 갈 일이 있는데, 같이 가도록 하지. 근사한 성당이 있는데...역사 좋아하나?”
“역사요? 좋아하죠”
“그럴 줄 알았어. 같이 가서 내가 성당에 대한 설명을 좀 해줄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도 할 일이 있거든 “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비에르 할아버지(이름이 근사하다)가 과연 피엔차에 볼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꽤나 오래된 피아트(거의 우리나라 포니 수준)를 타고 피엔차까지 같이 오게 되었다.
- 다음 이야기는 자비에르 할아버지와 함께한 피엔차 성당이야기…으음 뭐랄까 너무 진지한 역사공부가 될까 걱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