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도보여행 - 5
피엔차-몬티키에로-몬테풀차노
미리 말하건대, 지난 여정에 비하면 이야깃거리가 없는 매우 심심한 길이었다. 물론 피엔차-몬티키에로 구간의 풍경은 여전히 근사하다. 몬티키에로부터 몬테풀차노 구간은 쏘쏘.
사실 가능하면 오전 중에 도보를 끝낼 생각이었다. 오후에는 좀 더 강한 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조금 늦게 걷더라도 12시 전에 몬티키에로-몬테풀차노 구간을 시작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포장도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규도로라서 배수가 잘되고 정비가 되어있어 진흙길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토스카나의 도로는 의외로 비포장도로가 많다. 포장이 되어 있어야 좋은 것은 오로지 자동차뿐이다. 토스카나에서는 오픈카를 타고 흙먼지를 좀 날리며 포도밭 사이를 달려줘야 영화제작자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나온다.
문제는 피엔차부터 몬티키에로 구간이다. 오솔길에다가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이라서 비가 많이 오면 진흙 때문에 걷기 힘들거라 생각해서 가능한 오전에 이 구간을 지나가려 계획했더랬다. 자비에르 할아버지를 만나 역사공부를 하느라 계획보다 지체되었다. 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비를 만났다. 아침에 내리던 비보다는 확실히 강도가 있다. 진흙은 오전과 마찬가지로 신발을 잡아끌고 있고, 언덕길의 내리막은 확실히 더 미끄러워졌다.
아침을 먹었지만 둘이서 수다를 떨면서 다 소화가 된 모양이다. 심지어 배가 고프다. 마을축구장옆에 몬티키에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거의 다 온 모양이다. 몬티키에로도 역시 성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계획은 없었지만 여기서 해결하지 못한다면 굶고 저녁까지 가야 한다. 성문을 지나 보이는 첫 번째 식당에 들어갔다. 중세스러운 마을 분위기와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트렌디하게 꾸며져 있다. 이곳에서 추레한 내 몰골로 먹고 싶지 않다. 다행히 빈자리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냉큼 돌아섰다.
조금 더 올라가니 식당이 금세 또 보인다. 건너편에도 식당이 있다. 아니 이 조그마한 마을에 식당이 꽤 많이 있네. 게다가 식당 하나는 만석이라니. 다행히 이곳 식당은 마을 분위기와 닮았다. 내부는 단단하고 두툼한 기둥과 그것들을 잇는 아치 Arch로 투박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렇지. 토스카나의 식당이라면 이런 분위기가 제격이지.
게다가 물에 빠진 생쥐꼴인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준 곳이니 고마울 뿐이다. 구석의 2인석도 나에겐 감지덕지이다. 일단 물은 한 병 시키고, 메뉴를 보니 온통 이탈리아 말뿐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것저것 맛보고 싶지만 오늘 점심은 빨리 먹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뭐 먹을래? 그런데 이런 날씨에 도보여행 중이야?”
“응, 빨리 먹고 몬테풀차노까지 가야 해. 내가 시간이 없어서 딱 한 가지만 먹을 건데 뭘 추천해 줄래?”
“파스타? 미트? 피쉬?”
“미트”
“그래, 그럼 이거. 돼지고기인데 아주 맛있어. 감자를 곁들여서 내어 줄 건데 괜찮겠어?”
“좋아.(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하우스 와인도 한 잔만 가져다주면 좋겠어”
“물론이지”
눈을 찡긋하며 웃으며 돌아서는 그녀. 확실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교적이고 친화력이 좋다는 느낌이다.
돼지의 어느 부위를(작은 돼지의 다리인가?) 껍질째 굽고 조리한 ‘겉바속촉’이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이라 써놓고 보니 독일의 학센이 떠오르시겠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다. 일단 뼈를 발라내서 어느 부위인지 가늠하기 힘들고, 맛이 꽤 좋은 소스가 배어 있어서 빵으로 찍어 먹기 좋았다. 이탈리아에서 구운 감자는 진리이다. 어디 가도 구운 감자를 사이드로 주문하면 실패가 없다. 배가 고파서 그랬을까. 맛있어서 그랬을까. 빵으로 소스까지 싹 발라먹었다.
빵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다. 이탈리아에서는 식전빵이란 게 없다. 그냥 우리 밥이랑 반찬 먹는 것처럼 메인요리와 함께 먹는다. 이탈리아 음식, 우리 입맛에 좀 짜다. 동의한다. 그래서 담백한 빵이 필요한가 보다. 밥처럼 먹는 빵은 당연히 (한국의) 빠리바게트 빵과는 달라야 한다. 달지도 짜지도 않은 맹맹한 맛이다. 굳이 맛을 찾아야 한다면 고소한 껍데기가 누룽지처럼 맛있다는 정도.
메인요리를 다 먹을 때까지 절대 빵을 치우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있는 이탈리아식당처럼 일인당 한 개 주면서 식전빵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시골 트라토리아에 가면 종류별로 3가지 정도 한 바구니 놓고 간다. 다 못 먹고 남길 때가 더 많다. 어떤 식당은 바구니대신 봉투에 담아주기도 한다. 다 못 먹으면 남은 것을 봉투째 들고 가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식당에서 ‘빵’ 인심은 우리의 ‘반찬’ 인심처럼 후하다.
물론 고급식당으로 갈수록 ‘싸가지’가 없다. 음식의 양도 조금이고 빵도 조금이고. 그래서 웬만하면 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미슐랭의 별점식당은 반드시 피해야 할 곳이다. 아무거나 줘도 잘 먹는 나에게 미묘한 음식의 맛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내 경험이 일반화될 순 없다. 각자의 판단이고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훌륭한 미각을 가졌는데 아무 음식이나 먹는 것은 재능을 낭비하는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점심만 먹는 것으로 몬티키에로를 끝낼 수는 없다 싶어 골목을 잠깐 돌아보고 사진을 몇 장 남겼다. 성급하게 둘러보느라 사실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사진이 남아서 기억을 보완해 주어 다행이다. 골목에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꽤 보았다. 아침에 보았던 그치들인가 싶어서 유심히 보았지만 ‘빨간 재킷의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다른 팀인가 보다. 이곳 의외로 관광객이 좀 오는 곳인가 보다. 식당이 만석인 것도 그렇고, 사진팀도 그렇고.
작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고 예쁜 마을이다. 작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 사는 곳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지는 따뜻한 골목이었다. 누가 본다고 꽃으로 계단을 장식하고 거리는 깨끗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비가 와서 젖은 거리는 운치를 더하고 우산을 쓰고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하는 노부부도 보기 좋았다
조금 더 머물고 싶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여기부터 몬테풀차노까지는 지도조차 필요 없는 외길이다.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살랑살랑 걸어서 좋았지만 풍경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다. 이틀 동안 많이 본 풍경이라 그랬을까.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은 단단해서 좋았지만 젖산이 종아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퍽퍽한 길이다.
주위를 돌아보는 것도 자제하면서 부지런히 걸어서 그랬을까.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았다. 몬테풀차노는 와인으로 인한 유명세 때문일까. 비가 오지만 제법 사람들이 많다.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는 아담하고 깨끗하다. 젊은 커플이 와도 괜찮을 정도로 모던한 분위기의 내부이다. 호텔이 아니라서 마치 현지 주민처럼 도로 쪽으로 나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기분이 아주 그럴듯했다. 그 기분이 좋아서 별일도 없으면서 그날 오후 세 번 정도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
<게스트 하우스 입구>
몬테풀차노가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동네보다는 훨씬 크긴 하지만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와인저장고가 두 곳이 있는데 모두 무료개방하고 있어서 그냥 쓱 둘러보는 것이 좋았다. 원래는 시음도 할 계획이었는데, 나를 붙잡고 호객행위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직원들에게 일부러 해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시음해 보라고 권할까 봐 살짝 걱정을 했다. 와인을 구매할 계획이 없는지라. 이게 다 짐이고 욕심이라. 그래도 지하창고 가득한 와인을 보는 것은 좋았다.
벨베데레(전망대)에 가서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것도 좋았다. 이게 내가 걸어온 길이라고 의심이 들 정도로 아주 근사했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 보니 다른 방향이더군. 어쩐지.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언덕과 포도밭과 작은 마을과 길들이 한참을 쳐다보게 만든다.
<몬테풀차노 마을밖 풍경>
저녁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그럴듯한 식당에 가서 토스카나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즐겨볼까 하다가, 갑자기 피곤이 몰려드는 기분이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에게 추천할 곳이 있냐고 물어보니 바로 숙소 근처에 거의 하루종일 영업을 하는 간이식당을 추천해 준다.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메뉴는 ‘오늘의 메뉴’와 ‘주방장 추천’이다. 이번엔 주방장 추천요리. 묻자마자 자신 있게 돼지고기와 야채를 푹 삶아 만든 스튜가 아주 맛있다고 한다. 과연 토마토 베이스에 따뜻한 스튜가 입맛에 잘 맞았다. 남은 소스는 빵에 찍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긁어먹었다. 이런 나를 본 주방장이 엄지 척을 한다.
<저 봉투에 빵이… 두 개만 꺼냈다가 나중에 다 꺼내 먹었다>
이렇게 빵으로 접시를 닦아 먹는 것을 스카르뻬타 Scarpetta라고 하는데, 격식을 갖춘 리스또란테에서는 이렇게 하기가 좀 부담스럽다. 왠지 좀 없어 보인다고 할까. 너무 과하지 않게 정도껏 닦아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곳처럼 서민적인 식당이라면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단 1그램의 소스도 버리지 않고 모두 먹어버렸다. 이런 나를 본 주방장 엄지 척을 한다. 정말로 맛있게 먹었다며, 평소에 이렇게까지 스카르뻬타를 하지 않는데, 40K 도보여행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근데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는 아리송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소화도 시킬 겸 벨베데레에 다시 가서 주변을 돌아보고, 이제 서서히 어둠이 찾아오는 골목길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낮에 보았던 많은 관광객들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틀간의 도보여행을 무사히 끝낸 것에 감사드리며 성당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여행길에 기회가 되면 성당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오는 걸 좋아한다. 무탈하게 이곳까지 온 것에 감사드리고, 잠깐 쉬어갈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꼭 신을 믿어야만 성당에 가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란데 광장의 우물>
<몬테풀차노에서 내려다본 주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