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노그림 Dec 15. 2023

책 낸 사람

<중급한국어>

책 낸 사람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등단이라는 경로를 밟지 않고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한 작가들을 부르는 멸칭이라더군요.


어디서 봤냐구요?

<중급한국어>라는 글쓰기교본 같은 소설의 주인공이 책에서 언급했습니다. 등단한 선배가 책을 내려는 주인공에게 “너는 책 낸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그때는 그 말이 주는 모욕감을 알지 못한 채, “책표지가 이쁘게 나왔다”며 배시시 웃습니다.


어째 작가란 사람(등단 선배)이 소갈머리가 밴댕이 속 같을까요. 모름지기 작가라 하면 오픈된 마인드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고 넓은 사고의 바다를 가져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등단이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 작가가 된 사람들만이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현실에서의 삶과 <중급한국어>에서의 삶이 어쩐지 싱크로율이 매우 좋을 것 같은 소설입니다. 소설에서는 <호랑이와의 하룻밤>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현실에서의 작가는 <사자와의 이틀밤>을 썼습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시간강사 자리를 위하여 왕복 6시간의 운전도 마다하지 않고, 밥벌이를 위하여 번역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작가는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내고 글쓰기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여전히 경계를 맴돌고 있는 주변인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어떤지를 옆에서 바라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목에서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글쓰기는 정말 배워야겠는데 말이죠.


잊을 수 없는 대목은 ‘합평’을 설명하는 지점입니다. 합평에 관한 수강생들의 의견을 듣고 난 후,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두었습니다.

합평… 상대방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시간이다.


저도 글쓰기를 하면서 합평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초보자끼리 모인 곳이라서 치명상을 입힐 정도의 송곳니나 발톱을 가진 사람이 없었거든요.


책을 한 권 출간한 후, 모 인터넷 서점의 서평란에서 제 책에 대한 서평 중에 제 얼굴을 화악 달아오르게 하는 글을 본 적 있습니다. 그곳에 다시 가지 않게 되더군요.


이런 걸 보면, 제대로 발톱을 갈아 공격하는 합평을 면전에서 받게 된다면…으으으…생각하기도 싫어집니다. 주인공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기술고시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낙방이 되었는데요. 고시선배들의 수기 같은 것이 실려있던 <고시계>라는 월간지가 있었습니다. 공부가 하기 싫어지거나, 책 보는 것이 싫어질 때 이런 수기를 가끔 읽어보곤 했습니다. 기분 전환이 좀 되더라구요.


비슷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글쓰기를 하시다가 하얀 스크린에서 깜박이는 막대기가 부담스러워지시면 탁 덮어버리고 이런 책을 읽으면 어떨까요. 글 쓰는 사람은 다 비슷하구나 하고 위안을 얻거나, 에잇 하고 좀 더 좌절하거나.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구요. 또 좌절하고 또 쳐다보고.


이렇게 되돌이되는 삶이야말로 진짜 삶이라고 하네요.


이제 홍여사가 읽고 있습니다. 어떤 구절에 마음이 닿았나 봅니다. 빨간색 표지의 노트를 사다가 필사를 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98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