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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Sep 04. 2020

서울에도 내가 좋아하는 길이 있다

방구석 드로잉 여행 23

  사무실 옆 신축공사장에서는 아침부터 작업이 한창이다. 거대한 기중기에 매달린 체인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모빌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연주하는 산사의 풍경소리 같은 청량함은 물론 아니지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 며칠 전 아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유럽의 도시이야기도 좋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 이야기는 한군데도 없는 것이 좀 아쉽다고 했다. 유럽에는 걸어서 여기저기 다니는 거 좋아하면서 서울엔 그런 곳이 없느냐고 묻는다.  


  물론 서울에도 내가 좋아하는 길이 있다. 홍대에서 합정을 아우르는 길, 여의도 공원 산책로, 봉산 둘레길, 서울숲길, 독립문과 안산주변 숲길, 덕수궁과 정동길, 성곽길, 남산길, 한강둔치공원 등 걷기 좋은 길이라면 다 좋아한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첫 번째 길은 아내와 함께 주말이 되면 등산가방을 메고 식량조달과 군것질을 위하여 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멋진 공원과 전통시장이 있다. 공원을 지나고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방은 점점 무거워진다. 아내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마치 수렵생활을 하는 선사시대 사람처럼 과일과 채소들을 모은다. 공원에는 꽃의 향기가 있고 시장에는 사람의 향기가 있다.


  이런 저런 향기도 좋지만 호떡에서 풍겨오는 흑설탕의 카라멜향과 계피향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호떡을 하나씩 입에 물고 돌아오는 길에는 호빵집에 들려 딸아이 간식거리도 해결한다. 특별한 길은 아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다녀 본 길이라서 어느 길로 가면 봄의 꽃밭이 있고 또 어느 길로 가면 겨울의 빙판이 있어 미끄럼질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두 번째 길은 외국에서 온 친구가 서울 구경시켜달라고 하면 데려가는 길이다. 안국역에서 출발하여 북촌을 지나 삼청공원을 통하여 말바위까지 올라가면 오래된 서울과 새로운 서울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상당한 시간과 체력이 소요되므로 동행자의 상태를 봐서 말바위까지 완주를 할 것인지 아니면 북촌에서 이준구 가옥을 거쳐 돌아 나올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말바위까지 따라 갔던 친구 중에 서울을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원더풀’을 외치지 않았던 친구는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북촌 마을에 들려 전통차도 한잔 하고 여기저기 조그마한 전시를 하고 있는 ‘볼 수 있는 집’을 들러서 한옥 구경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혹시 도전적인 한국 음식을 찾는 친구에게는 달달한 떡볶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매운 쭈꾸미 볶음을 권해 본다. 눈물 콧물을 흘려가면서 먹는 모습이 안쓰럽긴 하지만 이 정도는 한국 사람들은 매일 먹을 수 있다고 허세도 부려본다. 물론 몇 젓가락 만에 기권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계란찜은 필수다.



  세 번째 길은 오롯이 나 혼자만을 위한 길이다.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수성동 계곡 숲길을 지나 윤동주 문학관에서 끝나는 산책길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도시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길이 있다는 것은 축복과도 같다. 숲길이므로 천천히 쉬엄쉬엄 지나간다. 산들바람이 불면 두 팔을 벌려 바람을 안아보고 혹시 비가 온 후라면 계곡물이 시원하게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이 뒤따르기도 한다. 곳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니 의자에 걸터앉아 가져간 책을 보며 조용히 침잠하는 것도 좋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을 때려도 좋다. 윤동주 문학관 옆에는 성곽길과 창의문도 있으니 한 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창의문을 지나면 부암동이다. 까페에 들려 차 한 잔 하는 것도 좋고 터덜터덜 창의문길을 따라 청와대 앞마당으로 내려오는 것도 좋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돌아가야 할 길이 분명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길을 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난 길에서는 다시 돌아오고 싶어진다. 회귀하는 연어처럼 언젠가는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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