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드로잉 여행 24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인스타그램에 그림들을 용감하게 공개하고 있다. 강호에 나가보니 고수는 즐비하고 잘 못하면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스타그램의 고수들은 성인군자들이었고 절대 하수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꺼내지 않고 대신 넉넉한 미소와 칭찬을 보내주었다.
풍경을 그리던 일은 어느새 다른 분의 책에 나온 사진까지 그려보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멋진 사진도 많은 책이었지만 그보다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이야기로 풀어냈다. 호주에 살다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프랑스로 가서 오래된 샤토(고성)을 사고 꿈꿔왔던 대로 집을 보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고생담이다. 지금은 집안의 한 쪽 벽면을 캔버스삼아 벽화를 그리고 계신다. 아직도 두려움과 주저함이 없는 청춘이시다. 책의 제목은 ‘나는 프랑스 샤토에 산다’. 다행스럽게도 저자가 내가 그린 그림을 좋아해서 원화를 보내드린 적이 있다. 프랑스에 오게 되면 들려달라고 하신다. 프랑스 고성에서 와인과 치즈를 즐기며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프랑스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고 싶은 곳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카우치서핑으로 인연이 된 케이티는 요크에 정착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매일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남편은 양을 키우는 자그마한 목장과 육가공을 하는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요크에서 가장 훌륭한 고기파이를 만든다며 이것만으로도 요크를 방문할 가치가 있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먹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 고기파이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B로는 무엇이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본다. 미적지근한 영국맥주와 두툼한 감자튀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억센 영국 중부지역 억양, 요크의 펍Pub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게 될 친구. 이만하면 고기파이가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진 않을 것 같다. 이제 영국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가고 싶은 곳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프라하 여행 중에 만났던 데이비드는 그의 소망대로 작은 트레킹 투어를 만들었을까. 프라하 토박이가 최고로 꼽는 비밀의 장소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호기심 때문에 이 도시를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도시 외곽으로의 트레킹과 시골 마을의 식당에서 기가 막힌 체코맥주와 푸짐한 시골인심을 맛 볼 수 있다니 정말 기대가 된다. 게다가 이 투어그룹은 아주 소규모의 인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체코로 여행을 다시 간다면 해보고 싶은 일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카우치서핑에서 만난 주쟌나는 결혼을 하면서 폴란드의 우쯔에 정착했다. 우쯔는 바르샤바에서 1시간정도 떨어진 곳이다. 특별한 곳은 아니지만 젊은 도시로서 활력이 넘치는 곳이라고 들었다. 아직은 불확실성이 높은 예술가로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 특유의 온화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모든 어려운 일을 잘 헤쳐 나갈 거라 믿는다. 언제 다시 폴란드를 가게 된다면 우쯔에 들려 나의 옛 친구가 어찌 지내는지 보고 싶다. 게다가 젊은 도시라고 하니 조금은 미친 곳도 가보고 아주 자그마한 일탈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는 일 아닌가. 이제 폴란드로 여행을 다시 간다면 해보고 싶은 일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만나고 싶은 거 말고 여행 중 진짜 만나고 싶은 사람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곤경에 빠진 듯이 보이는 여행자를 보면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낯선 볼로냐의 밤거리에서 주유를 하려고 20유로를 주유기에 넣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기계는 영 작동을 하지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주유를 하러온 아저씨, 유심히 주유기 옆에 적혀 있는 메모를 보고 이런저런 조작을 하더니 영수증 비슷한 것을 발급받는다. 그러더니 나에게 20유로를 주고 자기가 영수증을 갖겠다는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이곳에 사니까 내일 다시 와서 영수증을 보여주고 20유로를 받으면 되지만 너는 보아하니 여행자 같으니 이곳에 다시 올 필요 없이 그냥 가면 된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런 사람이 있어서 여행자는 행복하다.
둘째, 여행 중 나의 이상형은 아재 개그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중국 출장 중 호텔에서 현장으로 출근하는 4일 내내 아침마다 택시를 호출해주던 호텔리어가 있었다. 물론 예쁘고 귀엽게 생긴 아가씨이다. 체크아웃을 하던 날 마지막으로 택시 호출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려 했는데 보이질 않는다. 실망의 눈빛으로 캔디는 오늘 비번이냐고 물으니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기다리란다. 오 분쯤 뒤에 쉬고 있다가 호출당해 나온 캔디. 쫌 미안하다. 꼭 이 친구 아니어도 택시는 아무나 불러 줄 수 있는데. 매일 아침 택시를 함께 기다리면서 친구가 된 기분이라며 위챗(중국 카카오톡) 아이디를 알려준다.
기차역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 캔디와 위챗을 하면서 수다를 떨다가 캔디가 부탁이 있단다.
“뭔데”
“너 북킹닷컴에서 예약했잖아. 피드백 해줄 때 내 이름 넣어서 해줄 수 있어?”
“문제없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뭐라고 할 건지 물어봐도 돼?”
“음, Let me think. How about this? I strongly recommend to avoid Candy at the hotel, it will spoil your teeth."
"하하하, That's funny"
이런 형편없는 아재 개그를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여행이 즐겁다.
셋째, 다음은 실용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창의적이라고 할까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나도 모른는 사이에 엄청난 양의 동전이 생긴다. 비교적 쓸모가 많은 1유로 동전도 있지만 주로 1센트부터 50센트까지 다양한 동전이 주머니와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다. 볼로냐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한 잔 하려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잔뜩 꺼냈더니 카운터의 아가씨 눈이 반짝거린다.
“너 그 동전들 다 가지고 비행기 탈거야?”
“어쩔 수 없지. 버릴 순 없잖아”
“동전 다 꺼내봐. 내가 바꿔줄게. 너는 동전이 필요 없고 나는 동전이 필요하니까. 어때?
“나야 좋지”
볼로냐의 뒷골목에는 작은 식당들이 많이 있다. 복잡한 낮 시간엔 회전율을 높이려고 미리 만들어 놓은 두세 가지의 파스타를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하우스 와인 한 잔을 주문하고 오늘의 메뉴를 들여다보고 있다. 흰색파스타가 좋을까. 빨간색파스타가 좋을까 결정을 못하고 있다. 빨리 주문을 받고 싶은 웨이터가 묻는다.
“너 두 개 다 먹고 싶지?”
“어!(속마음을 들킨 듯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알았어?”
“너 같은 사람들 많아. 반반씩 가져다줄까?”
“힝, 나야 좋지”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이 나의 여행을 즐겁게 해주고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난 여행은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이제 여러분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것보다 여행자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