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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Aug 24. 2021

아이 키우는 일은 원래 어려운 거죠?

드래곤 길들이기보다 어렵다.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다. 세상에 나온 1일 차부터 지금까지 15년을 키우고 있으니 전문가가 되어야 했을 시간인데 아직도 초보일 때와 다름이 없다. 15년은 고사하고 그 열 배의 시간이 지나가도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전문가가 될 것 같지 않다. 가끔 방송에서 아이 키우는 일을 조언하는 ‘전문가’를 보면서 진짜로 궁금하다. 정말 ‘조언’대로 행동하면 아이가 ’ 각본대로’ 따라와 줄까?     


전문가에 따르면 엄마 아빠로부터 해답이나 충고보다는 위로를 얻고 싶을 때가 많다고 한다. 모의고사를 보고 온 날이다. 식탁에 모여 앉아서 위로와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를 해볼까 해서 말을 붙여본다.     


”우와, 우리 딸내미, 시험 보느라 힘들었지?”


“왜 그러지? 적응 안되게...나 시험 끝났으니 놀 거야”

하면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지금까지 거의 ‘방목형’으로 아이를 키웠다. 무슨 철학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귀차니즘’이 작동해서 그렇다. 내 경우를 봐도 시키는 대로 하는 척하다가도 틈이 생기면 냉큼 딴 길로 돌아가 버리곤 했으니까.

좋은 말로 유연하게 행동한 거고 실제는 잔머리를 굴리며 살아온 인생이라 그렇다.


이렇게 위험과 곤란은 가급적 회피하면서 살아온 인생인지라 ‘아이를 제대로 키운다’는 거창한 일은 할 수가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이 드니까 ‘나는 방목형 스타일’이라고 포장해 버리곤 아이를 ‘조련’하는 일에는 관심을 끊어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조금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공부를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좀 더 일찍 사교육을 시켰으면 아이가 조금 덜 힘들어했을까?


제 딴에는 하느라고 하는데 뭔가 불만이 많다.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보고 와선 입이 한 발은 나와있다. 도대체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면서 심화과정(이게 뭐지?)의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과외나 학원을 다니지 않고 어떻게 하냐며 짜증을 낸다.


수학을 잘하는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개념만 알아도 응용문제를 풀 수 있었을 테지만 ‘엄마 아빠 모두 수학 머리가 아니어서 미안하네’하고 위로를 한다. 수학 문제를 풀면서 사고력과 논리력을 키운다는 것까진 좋은데 ‘이렇게까지 어려운 문제를 들이 대야 하는 걸까?’에는 의심이 든다.


오늘도 끙끙거리며 수학 문제를 붙들고 씨름을 하고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4차 산업혁명이 어쩌구 해 봐야 아이들 골탕 먹이는 일은 변함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절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게 돕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아이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내버려 두라고 한다. 심각한 증상을 보이는 사춘기에 들어서더니 밤까시같이 변했다.


어릴 땐 귀엽기만 하던 꼬맹이를 돌려다오.


그래도 밤까시가 되기 전에 얼마나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던지를 되돌아보면 고드름처럼 뾰족해졌던 마음이 녹는 듯하다.



유치원 다닐 때이다. 하루는 집에 와서 유치원에서 굉장히 맛있는 ’노란밥’을 먹었단다. 카레인가 싶어서 당근도 들어 있고 양파도 있더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냥 노랗기만 했단다.


아내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뭘까 생각하다가 혹시 하니머스타드를 주었나 싶어 마트에서 사다가 조금 주었다. 이것도 맛있기는 한데 그게 아니란다.


“저, 선생님. 일전에 아이가 노란밥을 먹고 와서 맛있다고 해달라는데 그게 뭐였어요?”     


‘카레’란다. 헐! 세상에 야채는 눈곱만큼도 없이 카레가루만 물에 섞어 끓여 주었나 보다.


당근과 양파를 잘게 다지고 돼지고기는 갈아서 제대로 된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아이는 만세를 부르며 엄마가 해준 노란밥이 훨씬 더 맛있단다. 급식비가 이런 식으로 원장의 호주머니 속에서 녹아버렸는가 보다.



물소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표지로 한 'The great migration'이라는 조그만 영어책자를 열심히 보고 있다.

아니구 열심히 읽는 흉내를 내고 있다.     


(표지에 있는 철자를 가리키며) "이거 뭔 뜻인지 알아?"     


놀랍게도 알고 있단다.     


"물소 떼"     


크크 그럴 줄 알았다.


저녁을 먹다가 한마디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진짜 밥 먹는 거 좋아한다고.     


미안하다구 하면 되지...담에 밥 살게.

다음에 보자구 하면 되지...담에 밥 한번 같이 먹자.

위로하면 되지... 그래두 밥먹구 기운내야지.     


 아이 도대체 이런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요?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던 꼬맹이가 어디로 가버리고 ’밤까시’가 오늘도 집안을 굴러 다니고 있다.

그래도 이 아이가 있어서 아내와 나는 행복하다.     


마케팅을 하고 있는 카드회사에서 공짜 쿠폰을 보냈다. 꼬맹이가 이런 거 은근히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슬쩍 카톡으로 보내보았다.

오늘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단답형 대답.


“넵”     


헛헛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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