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은 낯설지 않게 강조되는 분야 중 하나가 되었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회적 기조는 수많은 서점과 미디어에서 각종 인문학 관련 도서나 강의를 다각도로 소개하고 있는 현상에서 명백히 드러나며, 여기에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는 응용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호응과는 별개로, 실제 인문학을 연구하는 전당인 대학 내에서 인문학의 지위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모순적인 현상은 우리가 주목할만하다. 언젠가부터 대학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평가 등급을 스스로의 중요한 가치 척도로 삼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학은 더욱 높은 평가 등급을 얻기 위해 양적 성과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학문(특히 의대, 공대, 경영대 등)을 주력으로 삼고 이에 비해 양적 성과가 적은 순수 학문(특히 인문학)은 소외되거나 심지어 사라지는 수순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인문학에 대한 모순적인 반응이 공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은 현재 우리 사회에 불고있는 인문학 열풍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 역시 지금의 인문학 열풍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부터 시작해보겠다.
2007년 인류 문화는 전에 없던 전환점을 맞이한다. 태평양 건너의 나라에서 스티브 잡스라는 한 혁신가가 최초로 내놓은 아이폰은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던 정도로 인류의 삶 전체를 뒤바꿔놓았다. 불과 10년 남짓한 사이에 아이폰을 필두로 한 스마트폰은 대부분의 지식정보화된 사회를 잠식해갔으며 지금은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에 자리하는 핵심 기술이 되어버렸다.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업적의 평가를 힘입어 우리 시대의 혁신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 그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나 그가 지나온 발자취 (특히 한국에서는 그가 대학 중퇴라는 사실이 많은 화제가 되었는데)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중 우리가 집중하려는 것은 단연 인문학과 관련된 그의 발언이다. 스티브 잡스라는 창의와 혁신의 아이콘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최근 한국에서 불고있는 인문학 열풍의 근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가 강조한 인문학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열광하는 인문학은 그가 언급했던 인문학과 같은 학문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티브 잡스가 실제로 인문학을 언급했던 경우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생전에 공식적으로 두 번 인문학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먼저, 1995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컴퓨터 과학(computer science)이 인문학(liberal arts)처럼 모두가 배워야 할 교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2011년 했던 말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바로 그 말이다. 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잡스는 애플의 DNA에 기술과 인문학(liberal arts, humanities)의 결합이 있다고 말하였으며 이 발언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열광하게 된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2011년 그가 언급한 인문학의 영어 표현인데, 여기서 잡스는 liberal arts 와 humanities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영어권에서 일반적으로 인문학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두 단어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파악해보는 것은 인문학이 무엇인지 밝혀보려는 이 글의 취지에 중요한 부분이다.
대중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지금 불고있는 인문학 열풍의 원인에는 박근혜 정부 시절 실시되었던 창조경제 정책이 한몫을 담당한다(신동순, 2015).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취임한 이후로 꾸준히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국정의 주요 기조로 삼아왔다. 특히나 당시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은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대단히 강조하며 이 두 분야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창조경제 정책의 최전선에서 기능했던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기관이 인문학적인 강좌를 종종 실시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정부의 투자를 힘입어 민간 분야에서도 인문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각종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신동순, 2015).
그러나 정부 주도의 인문학 융성 정책은 금세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차인 2014년, ‘대안을 준비하는 문화정책포럼’이란 행사에서 강내희 교수(중앙대 영어영문학과)가 지적한 사실은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정책이 “거대 자본에 의한 대학의 기업화, 교양 영역을 축소하는 정부 정책”이라는 점이다. 이어서 오창은 교수(중앙대 교양학부대학)가 인문학이 “국가 정책의 도구”로 이용되거나 “성과 위주로 접근”하고 있는 정책의 방향에 대한 지적도 보탰다.
지금 우리가 체감하는 것처럼, 한국 인문학의 현실은 당시의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크게 개선되었다고 느끼기 어렵다. 물론 그 기간이 지나치게 짧았기 때문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당시의 투자가 국민들이 인문학에 대해 갖는 인식에라도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우리는 체감하지 못한다. 짐작하기로는 이같은 실패의 원인이 아마도 당시 정책을 추진했던 과정에서 인문학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는 인문학을 단지 경제 발전과 기술 개발을 위한 도구로서 필요로 했다는 점과 인문학의 융성과 문화 융성이 분명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목표에 대해 너무나 쉽게 동일시 했다는 점 때문에 당시의 정책은 추진력을 잃고 박근혜 정부의 추락과 함께 지금도 그 흔적을 감추어버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역설적이게도 인문학 그 자체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인문학이 지닌 학문적 의미와는 별개로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요구하는 필요로서 인문학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요구하는 인문학의 모습은 오히려 인문학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다음으로는 인문학이 대체 어떤 의미로 축적되어온 학문 분과인지를 탐색해보고, 인문학이 지닌 고유한 의미를 통해 현재 불고있는 인문학 열풍의 이해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Liberal Arts는 흔히 자유학문 혹은 자유학과로 번역되는 용어로 영어권에서 인문학을 지칭할 때 자주 쓰이는 말 중 하나다. 그러나 더 엄밀한 의미에서 Liberal Arts는 인문학보다 교양학문에 더 가까운 말에서 기원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재 Liberal Arts가 인문학과 혼용되고 있는 것일까?
Liberal Arts의 형성은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되는 시점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때 Liberal Arts는 자유민 신분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교과목으로 일종의 교양이었다. 이후 약 13세기에 등장한 대학은 상부학부인 법학부, 신학부, 의학부와 기초학부인 철학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인문학은 일반적으로 교양학부라고 할 수 있는 철학부의 교과내용을 아우르는 말이었으며 법학부, 신학부, 의학부와 같은 상부학부의 학업을 준비하기 위한 하부학부, 즉 일종의 교양 교육을 수행하는 교과목이었다(백종현, 2007). 그리고 이 교양과목에 포함되었던 것이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아 중세 수도원에서 발전된 7자유학과(7 Liberal Arts)였으며 언어 교육을 위한 3학(Trivium -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조화와 균형의 모범인 4과(Quadrivium - 대수학, 음악, 기하학, 천문학)가 여기에 포함되었다(백종현, 2007).
이같은 전통에서 우리는(특히 서양사회는) 인문학을 여전히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 여기는 문화 속에 있다. 특히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백종현(2007)은 “‘자유의 학문’으로서 인문학은 ‘매인 데 없이 한가롭게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자기 실현을 생명으로 하는 학술 연찬’인 바,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어떠한 ‘직업과도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 Liberal Arts는 자유민을 기르기 위한 교양학문으로서 인문학과 유사한 의미로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 Humanities는 전공으로서의 인문학 또는 학문 분과로서의 인문학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Humanities의 유래는 르네상스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르네상스는 15,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문주의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 운동의 활력을 공급한 것은 그리스, 로마 고전의 재발견이었다. 이로부터 로마의 지식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인간적인 것(humanaus)으로서의 인문소양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개념을 계승하여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란 용어가 탄생하였고 이는 우리가 현재 ‘인문학’으로 번역하는 Humanities란 용어의 뿌리가 되었다(백종현, 2007). 당시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에는 문법(grammatica), 수사학(rhetorica), 시학(poetica), 역사(historia) 그리고 도덕철학(philosophia moralis)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중세의 3학 중 논리학과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4과가 빠졌다. 이러한 인문학의 새로운 교과 편제는 오늘날 서구 인문학의 영역인 문학[文]·사학[史]·철학[哲]을 묶는 ‘인문학’ 개념이 발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백종현, 2007).
지금까지 서양에서 인문학을 지칭하는 두 단어 Liberal Arts와 Humanities가 어디서 유래했으며 서양학문의 전통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글의 마지막에서는 이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근래에 들어서 인문학이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짚어보고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인문학이란 무엇인지 그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근대 이후의 인문학을 가장 특징지을 수 있는 단어는 ‘과학화’와 ‘수단화’이다. 서양에서 근대 이후의 인문학은 다른 근대 과학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탐구 방법과 탐구 대상을 갖춘 학문으로 자리매김을 시도하였으며, 대학 내의 인문학도 이러한 흐름 아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엄밀함을 지키도록 강요되어 왔다(백종현, 2007). 이에 따라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기 위한 교양 교육으로서의 인문학은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인문학도 자연과학처럼 하나의 연구작업으로서 수행되거나 보다 기능적인 근대적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강요되어왔다(백종현, 2007).
그러나 이와 같은 인문학의 변화는 인문학이 지닌 본질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며 일종의 변질이다. 인문학이 지닌 본질은 분명 자연과학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오히려 “인문학은 인간이 사변이나 생각의 방법을 중심으로 인간만이 가지는 어떤 독특한 특징을 찾으려는 학문”으로 규정 될 수 있을 것이다(최현철, 2012). 이미 19세기 말부터 딜타이(W. Dilthey)와 같은 학자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방법론을 적용하여 인문학을 ‘정신과학’으로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이는 물질세계를 다루는 자연과학과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인문학을 구분하는 것으로 그 고유성을 찾으려는 시도였다(백종현, 2007: 134).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문학은 딜타이의 구분을 뛰어 넘는 인문학이어야 한다. 애초에 과학(science)이란 용어는 라틴어 scienctia에서 유래한 말로 이는 ‘앎’ 또는 ‘지식’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얻는 다양한 지식의 총체를 나타내는 scientia가 근대 이후로 수학적-실험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의 고유한 명칭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모든 지식과 학문이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표준화되어야 한다고 착각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인문‘과학’을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문학만이 가지는 고유한 방법과 목표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갈 필요가 있다. 인문학이란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기초이자 “성장하는 세대가 인간다움의 이념을 충실히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최현철, 2012: 187)”이어야 한다.
나아가 인문학은 직업을 위한 학문이 아니며, 인문교육은 직업교육일 수도 없고, 직업교육이어서도 안 된다. 대학의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대학에 입학하면 누구나 인문교육을 받아야 한다. 인문학은 한창 지적 성장기에 있는 사람에게 창의적 상상력, 심미적 감성, 자기성찰의 능력을 길러주고, 전통 문화와 인류 세계의 다양한 문화 양상과 역사에 대한 식견을 갖도록 해주며, 자유롭게 자신의 역량을 가늠할 기회를 제공하고, 대중 사회 안에 살면서도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지혜와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판단 능력을 갖도록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능력 배양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어느 분야에 종사하는 이에게나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문교육은 대학과정의 기초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기초학문’이라 일컫는다(백종현, 2007: 134-135).
결국 우리가 추구할만한 인문학은 직업교육과 관련이 없으면서도 인간다움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시해야만 하는 그런 인문학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것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위기와 특성을 분석한 다양한 논의가 있기 때문에 단적으로 바람직한 인문학 교육을 규정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인문학에 관한 공통적인 특징으로서 그것이 '인간다움'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인문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나아가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궁극적인 바람은 우리 모두가 인문학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며 인문학이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갔으면 하는 것이다.
2019.
** 이 글을 쓰면서 아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신동순(2015). 한국의 인문학 위기와 인문학의 대중화 담론 일고. 한중인문학포럼 발표논문집, pp. 272-280.
백종현(2007). 한국 인문학 진흥의 한 길. 지식의 지평 2: 인문정신과 인문학, pp.123-147. 서울: 아카넷.
최현철 (2012).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에 대한 소고. 시민인문학, 23, pp. 183-214.
강수원(2014, 4, 14). 인문학을 담은 ‘인문정신문화정책’을 위해. 서울대학교 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