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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Jan 27. 2017

지노 배낭여행기 - 뉴질랜드편 14

James Busby의 뒷이바구


와이탕기 조약을 비롯해서 초기 뉴질랜드 역사를 뒤져보면 제임스 버스비의 이야기가 꼭 따른다. 조약 체결된 이후 제임스의 행보가 무척 이채로워 자료를 찾아 추가적으로 요약해보면 이렇다.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1801년 스코틀랜드 에딘버그에서 출생한 제임스는 23살 때( 앞의 자료에는 22살로 되어 있다) 부모와 함께 호주 시드니로 이민갔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 가기까지 약 8년을 NEW SOUTH WALES(NSW)에서 대부분 공무원으로 보내는데 국세청 세금 징수원,  농장 학교 매니저로 일하였다. 농장학교 매니저란 제임스가 시드니로 이민와서 포도재배 경험이 있어서 포도 재배 기술을 잠시 가르치고 있었고 그 댓가로 토지를 불하받아 제임스도 자기 땅에서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만들어 호주 포도주 역사에서는 “포도주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공무원 일이 따분했던지 아니면 더 나은 직업을 추구했는지

 1831년 제임스는 시드니에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런던에서 해외영토 확장을 담당하는 COLONIAL OFFICE에서 당시 막 정착이 시작된 NEW ZEALAND에 BRITISH RESIDENT로 지명되어 1832년 임지인 BAY OF ISLANDS로 떠난다. 여기서 RESIDENT의 직위를 다시 디벼보니 “해외주재 사무관”으로 되어 있다. 말 그대로 BAY OF ISLANDS에 정착한 본국인이나 포경업자 SEALER등 상업 활동을 하는 본국인의 보호와 관리가 그의 임무인 셈이다. 1832년 11월 결혼한 제임스는 지금의 와이탕기 그라운드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사무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사무관으로서의 능력 발휘


제임스는 3년후 1835년 영국 정부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멋진 큰 일을 잘 마무리하여 본국의 신임을 받았다. 1835년 뉴질랜드에 정착한 프랑스인 BARRON이 원주민으로부터 매입한 4000에이커 자기땅에 프랑스 주권을 선포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임스는 혼자서 뉴질랜드 독립선언서를 기초해서 BAY OF ISLANDS 주변으로 한 NORTHERN NEW ZEALAND 에 거주하는 원주민 마오리 족장 35명을 규합하여 자기가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마치 구한말 우리나라 독립선언서처럼 최남선이 기초하고 손병희 선생을 비롯 33인이 서명한 그것과 흡사하다. 그런데 와이탕기에서는 제임스가 기초하고 선언까지 혼자서 다 해 먹는다. 1835년 독립선언이 최초의 뉴질랜드 독립선언으로 기록된다. 이 사건이 결국 5년 뒤 와이탕기 조약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프랑스의 주권 선포 계획을 무산시킴으로써 원주민 마오리 족장들에게 영국의 힘을 한번 과시하게된 계기가 된 셈이다. 그래서 와이탕기 조약이 불평등 조약임을 알고서도 서명한 마오리 족장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영국 아니면 프랑스 둘 중에 달려 있음을 알고 프랑스보다는 영국을 택한 것으로 간주된다.(당시에 영국의 무적함대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와이탕기 조약이후 제임스의 행보


1840년 2월 와이탕기 조약식을 거행하기 전에 영국 정부는 새로운 조치를 취한다. 제임스의 “해외주재 사무관” 직을 박탈하고 대신 뉴질랜드 총독을 새로 파견한다. WILLIAM HOBSON이 최초의 뉴질랜드 총독으로 파견된다. 윌리엄은 해군 장교 대위로 무관이다. 영국 정부로 볼 때도 이제 와이탕기 조약 이후부터는 정식으로 뉴질랜드를 통치해야 하는데 문관보다는 무관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조약 서명식 이후 제임스의 RESIDENT 직을 박탈하고 대신 다른 나라의 해외주재 사무관직을 제의했으나 제임스는 이를  고사하였다. 이 후부터 제임스는 와이탕기 주변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 경영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1840년 조약이전까지 제임스는 와이탕기에 약 만 에이커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조약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변 토지를 매입하였으나 1844년 FINANCE 위기가 닥쳐왔다. 돈을 빌려 준 은행이 토지와 집등 모든 재산을 차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845년 3월 BAY OF ISLANDS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을 피해 제임스 가족이 시드니로 피신해 있다가 전쟁이 끝난 후 1846년 다시 와이탕기 집으로 돌아 와보니 집앞 그라운드는 58연대 보병들이 천막을 치고 주둔하고 제임스 집은 연대장 관사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제임스는 토지 소유권 문제로 차압 은행과 지나긴 법정 소송을  진행해야만 하였고 결국 1868년에야 그가 잃어버린 토지에 대한 보상금으로 36,800 파운드를 받게 되었다. 죽기 전까지 오클랜드 신문 편집인으로 일을 했고 오클랜드 지역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60년 BAY OF ISLAND 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871년 눈 수술하러 영국에 갔다가  그곳에서 눈을 감아 런던에 있는 WEST NORWOOD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제임스가 죽은 뒤에도 미망인은 와이탕기 그 집에서 살다가 1889년 죽었는데 유해는 와이탕기 바로 밑에 있는 PAIHIA에 묻혔다. 제임스의 와이탕기 집과 토지는 1932년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GOVERNOR-GENERAL인 VISCOUNT(자작) BLEDISLOE가 구매하여 정부에 기증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우리하고 생전 관계도 없을 법한 JAMES BUSBY 이바구를 여러분은 읽는다고 나는 스토리 만든다고 진짜 욕봤다. 내가 제임스 이바구에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항해 기록이다. 첫번째는 영국에서 시드니로 이민올 때 범선을 타고 왔을테고(한 7-8개월 걸렸겠지) 두번째 RESIDENT 보직구하러 시드니에서 영국 돌아 갔을 때도 범선을 타고 갔겠지. 세번째는 해외주재 사무관으로 임지로 갈 때는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범선을 타고 갔을테고 네번째는 눈수술받으러 영국으로 갔을때도 범선을 타고 갔을 텐데. 그리고 자주 와이탕기에서 시드니로 들락날락 거릴 때도 범선을 타고 왔다 갔다 했을거로 추정되는데…… 내가 부러운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세일보트(범선)  타보는 것이다.



                          제임스 버스비 초상화


와이탕기 기념관 건물 옆에 있는 기념비로 동판에 BLEDISLOE가 매입해서 정부에 기증했다고 되어있다. 이름앞에 Viscount라고 되어 있는데 자작이란 뜻이다.


작위의 오등급을 보면


1) 공작: Duke
2) 후작: Marquis
3) 백작: Count
4) 자작: Viscount
5) 남작: Baron 으로 우리가 잘 아는 백작은 꼴랑 세번째 순위에 올라가 있다.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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