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티(Tahiti) 본섬 일주
2017년 6월 12일(일) 맑음
보라보라섬 구경을 마치고 뭍으로 나온 줄 알았는데 밟은 땅이 또 섬이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수도가 있는 Tahiti섬이 바로 화가 폴 고갱이 43세가 되던 1891년 여름에 파리에서 혈혈단신 건너와 현지 처자와 새살림을 차린 곳으로 타히티=고갱이란 등식이 성립된 곳이다. 일정을 짤 때 인근 다른 섬을 둘러보고 Tahiti는 맨 마지막 날로 잡은 이유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인 칠레 Easter Island행 뱅기가 새벽 3시 20분에 있기 때문에 타히티 섬 일주를 하고 난 뒤 공항에서 몇 시간 대기하다 뱅기를 탈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짠 것이었다.
타히티에는 볼만한 3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고갱의 모작(Copy)만 전시하고 진품은 하나도 없는 고갱 기념관, 타히티와 프렌치 폴리네이션의 역사를 잘 정리해 유물과 자료를 전시해 놓은 역사박물관, 그리고 진주(Pearl)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진주 박물관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타히티에서 생산되는 흑진주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다고 한다. 고갱 박물관은 Reno(재정비) 중으로 휴관이고 시내에 위치한 진주 박물관은 별 흥미가 없어 역사박물관만 보기로 하였다. 역사박물관은 주로 프렌치 폴리네이션에 속하는 섬들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여러 자료들을 잘 전시해 놓았다.
타히티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은 1767년 영국 해군 함장인 Samuel Wallice(1728-1795)로 세계 일주 항로를 개척하던 중 지금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다 폭풍을 만난 후 바로 순항하다 타히티를 발견하고 섬 이름을 <조지 3세>라고 명명하였다. 다음 해인 1768년 프랑스 항해사로 프랑스인 최초 세계일주자로 기록되는 루이 앙투앙느 부갱빌(Louis-Antoine de Bougainville: 1729-1811)이 타히티섬을 발견하고 상륙하여 자의적으로 프랑스 영토로 선포하였다. 다음 해인 1769년 4월 영국 해군 대위인 제임스 쿡 선장(1728-1779)이 영국 왕립 학회의 명령으로 천체 관측(금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 측정) 목적으로 타히티에 상륙하였고 - 이것이 그의 1차 항해로 이때 발견한 타히티 주변 섬들을 항해를 후원 지원한 영국 Royal Society를 기념하여 소시에테 제도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영국 항해사에 최대의 해상 반란 사건으로 기록되는 바운티호의 반란 (Mutiny on the Bounty)에 등장하는 William Bligh(1754-1817) 선장이 Bounty 호를 몰고 1789년 타히티섬에 상륙하였다. 임무는 남태평양에서 재배되는 빵나무를 서인도 제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 식량으로 대체하고자 빵나무 묘목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대항해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해외 영토 확장정책에 편승하여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타히티는 부갱빌의 조치(주권 선포)로 원주민의 포마레 왕조를 거쳐 결국 프랑스 식민지로 편입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시내 Pomare Blvd에 부갱빌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787년 12월 영국 군함 바운티호가 포츠머스항을 출항하였다. 목적지는 남태평양의 타히티(Tahiti)로 임무는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에게 식량으로 활용할 타히티섬의 빵나무 묘목을 서인도 제도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승선 인원은 선장 윌리엄 블라이(William Bligh)를 포함하여 총 46명으로 일등 항해사 존 프라이어(1753~1817)와 이등 항해사 플렛처 크리스천(1764~1793), 그리고 하급수병들과 노무자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남태평양으로 가는 항로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통과하는 약간 순탄한 항로와 뱃길은 힘들지만 항해 일수가 단축이 되는 대서양으로 내려가서 남미 하단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남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었다. 공명심에 들떤 블라이 선장은 갈 때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타히티로 가고, 돌아올 때는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환하면 세계 일주 기록을 세우게 되므로 반대하는 항해사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독단적으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험한 뱃길을 통과 못하고 한 달을 소비하고 나서야 결국 뱃머리를 순탄한 희망봉으로 돌렸다. 이때 일등 항해사 존 프라이어과의 마찰로 그들 해임하고 이등 항해사인 플렛쳐 크리스천에게 배를 맡겼다. 항해하는 동안 블라이 선장의 독재와 심술궂은 개인적인 성향으로 많은 승무원이 고초를 당해 선장은 신임을 잃게 되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선상에서 규칙을 위반하면 가차 없이 옷을 벗겨 채찍질로 벌을 주곤 하였다.
긴 항해 끝에 타히티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지상천국과 같았다. 술과 음식에다 타히티 여자들이 있어 대부분이 싱글이었던 선원들은 타히티 현지 여자들과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선원들의 기강도 문란해졌다. 특히, 배의 서열 두 번째인 크리스천 항해사가 추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뒤에 이런 로맨스가 남태평양 관련 문학과 영화에서 stereotype이 되었다) 정신을 못 차리자 격노한 블라이 선장과의 불화가 야기되어 후에 선상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
5개월 정도를 타히티섬에서 보내면서 1,000여 그루의 빵나무 묘목을 준비하여 떠나기 싫어하는 승무원을 다그쳐
1789년 4월 8일 타히티를 출발하여 서인도제도로 3주간 항해하여 지금의 Tonga에 속하는 Tofua 근처에서 4월 28일 항해사 크리스천 주도하에 선상 반란이 일어나 블라이 선장을 포함하여 반란에 반대하는 선원 18명을 구명보트에 태워 약간의 식량과 물을 주어 남태평양에 표류시키고 반란자들은 배를 돌려 타히티로 돌아가기 전에 지금의 Austral 제도 중의 한 섬인 Tubuai로 숨어들었으나 원주민과의 불화로 다시 타히티로 옮겨 가서 그곳에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선원 일부를 내려주고, 원주민 남자 6명, 여자 11명과 어린이 1명을 싣고 당시 무인도였던 핏케언(Pitcairn) 섬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바운티호를 불태우고 그 섬에 정착하였다.
구명보트에 실려 해상을 표류하던 블라이 선장 일행은 47일간의 표류 끝에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티모르의 쿠팡항에 도착하여 14명만 목숨을 건졌으나, 여기에서 4명이 더 죽어 결국 블라이 선장을 비롯하여 10명만이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란 사건을 접수한 영국 해군은 수색선 판도라호를 남태평양에 급파하여 반란자 색출 작전을 수행하여 타히티섬에 은거하던 반란자 14명 전원을 체포하여 영국으로 귀환하던 중, 호주 동부에 있는 대산호초에서 배가 암초에 좌초되어 승무원과 반란자 일부가 목숨을 잃어 10명의 반란자만 본국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아 이중 4명은 무죄로 방면되고 6명 중 3명은 반란 가담자로 인정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빨간 선이 블라이 선장이 호주와 뉴질랜드 남쪽을 돌아 타히티에 도착한 항로이고, 녹색선이 반란이 일어난 후 블라이 선장과 그 동조자들을 태운 보트가 내려져 쿠팡까지 표류한 항로이며, 노란선이 반란 후 바운티호를 몰고 다시 타히티로 들렀다가 여자들을 싣고 Pitcairn섬으로 도망친 항로를 보여준다.
타히티 남녀 원주민을 데리고 Pitcairn섬으로 도주한 항해사 크리스천 일당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반란자들 체포 임무를 수행하러 온 판도라 함은 타히티에 정착한 14명 전원을 약 한 달만에 체포하였으나 당시 무인도였던 Pitcairn섬은 해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아 수색작업에서 제외되어 안전할 수 있었지만, 몇 년 후에는 핏케언섬에서 원주민 남자들은 노예 비슷하게 취급당하자 폭동을 일으켜 백인과 원주민간 서로 죽이는 살육전으로 치달아 성인 남자들은 거의 죽었고, 반란 주모자 크리스천 항해사도 역시 살해되었다고 한다. Bounty 해상 반란 후 핏케언으로 숨어 들어간 지 약 19년 후인 1808년 미국 포경선이 우연히 이 섬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성인 남자는 유일하게 존 아담스(해상 반란자)만 살아남았고 여자 8명과 어린이 18명만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포경선에 의해 핏케언섬과 해상 반란자 존재를 알게 된 영국 해군은 1814년 함대를 파견하게 되고, 실상을 조사하여 주모자 크리스천이 살해되었음을 확인하고 존 아담스는 사면시키고 반란 사건을 비로소 마무리하였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바운티호의 반란>의 이야기는 총 3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1935년에 첨으로 만들어진 영화에는 블라이 선장 역에는 찰스 로튼, 크리스천 역에는 미남 콧수염 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출연해서 둘 다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아무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영화가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Ocean’s Eleven이란 사기범죄영화의 원조 제작자)에 의해 1962년 제작되었는데 블라이 선장 역에는 악당 단골 역의 트레버 하워드(Trevor Howard), 크리스천 역에는 말론 브랜도(당시 38세)가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추장의 딸로 크리스천과 사랑에 빠지는 현지인 처자 역으로 <타리타>란 20세의 타히티 미인이 현지에서 스카우트되었는데 영화 촬영 후에도 진짜로 사랑에 빠져 말론 브랜도와 결혼하여 그의 현지처가 되어 슬하에 1남 2녀를 두어 폴 고갱 못지않게 타히티의 로맨스 가십으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세 번째로는 1984년에 멜 깁슨(크리스 천역)과 앤서니 홉킨스(블라이 선장 역)의 주연으로 The Bounty 란 영화가 만들어졌다.
차로 섬 일주를 하기 전에 세일보트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정박되어 있는 물가로 걸어갔다. 멋진 요트와 세일보트들은 언제 봐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더더구나 남태평양 섬들을 돌면서 보는 세일보트의 꿈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흥미 유발을 시키는 아이템으로 머릿속에서는 멋진 세일보트를 몰고 오늘은 남태평양 이 섬에서 내일은 저 섬으로 옮겨 다니는 항해생활을 그려보곤 했다. 아마도 부질없는 꿈 일련 지도 모르겠지..... 아니 어쩌면 이 지구를 떠날 때 가슴에 품고 갈 한이 될련 지도 모르겠다.
차로 섬을 돌고 난 뒤에도 저녁 먹으러 파피테 마리나로 와서 낮에 보지 못한 세일보트를 봤는데 미국 국적의 세일보트를 두 대나 보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사진으로 담았다. 세일보트 뒤를 보면 보통 나라나 도시명을 표시하고 요트 이름을 적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요트 이름은 등록하게 하여 항해 시 해양경비대에 보고하도록 되어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오레건주에 등록된 두 대의 세일보트가 여기 파피테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배들의 항로를 짐작해보면, 내가 여행한 경로와 거의 일치할 것이다. 통상 미서부 해안의 밴쿠버, 샌프란시스코, LA, 샌디에이고에서 출발하여 뱃머리를 하와이로 향해 항해하고 하와이에서 쉬면서 재정비하여(이를 항해 용어로 refit이라고 한다) Fiji를 향해 남태평양으로 내려온다. Fiji가 남태평양 섬들 중 중심이 되는 기착지로 보면 된다. 피지에서 각자 항로를 정하여 서쪽으로 가면 뉴칼레도니아로, 동쪽으로 가면 타히티로, 남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뉴질랜드로 가게 된다. 저 두 미국 배는 아마도 피지에서 뱃머리를 동으로 돌려 사모아, 통아를 거쳐 타히티 파피테로 들어왔을 것이다. 기간은 최소한 3-5개월 이상 소요되는 긴 항해이었을 것이다.
유럽 OECD 국가들의 회사 CEO나 중역진들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이 세일보트 타는 것이다. 휴가만 받으면 그들은 배로 달려간다. 우리로 봐서는 거의 광적인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 생각으로는 세일보트를 타게 되면 다른 취미활동에서는 느낄 수 없는 크나큰 힐링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배를 타게 되면 바로 즉시 매달려서 싸워야 하고 풀어야 하는 과제는 크고 작은 회사일에 대한 의사결정이 아니고, 그런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바로 눈앞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과 싸워야 하고 바다 물결을 다스려야 하는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세일보트의 세계적인 시합이 America’s Cup으로 근대 올림픽보다 45년, 축구 피파 월드컵보다 79년, 골프 브리티시 오픈보다 9년 일찍 1851년에 시작한 대회로 그 Cup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트로피로 알려져 있다.
세일링의 선두 주자 국가들이 주로 유럽 국가들로 영국, 프랑스, 이태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강자이다. 세계의 해양강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컵을 차지해야만 하는데, 원칙이 출전국에서 제조한 요트로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승하기 위하여 각 나라들이 엄청난 물량의 돈과 인력을 투자하고 있다. 우승하게 되면 해양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어 요트 산업의 강자로 떠오르게 된다. 다행히 한국도 다음 아메리카스 컵에 출전한다고 하니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도 요트 산업을 활발하게 발전시켜 요트를 대중 스포츠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
지도를 보면 섬이 하나이지만 큰 섬에 마치 혹처럼 작은 섬이 붙어있는데 작은 섬에는 남부 일부 지역이 높은 산악지대로 되어있어 일주하는 도로가 없다. 전체 PF(프렌치 폴리네이션) 인구가 25만 정도로 추산하는데 그중의 70% 이상이 수도인 타히티섬에 있는 파피테(Papeete)에 모여 살다 보니 다른 나라의 대도시처럼 출퇴근 길의 교통체증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해안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어 돌아보는데 별 문제는 없었다. 특이하게도 Societe 제도의 다른 섬들은 미세하고 부드러운 하얀 모래였는데 유독 타히티 해변만은 검은 사장이었다. 맨날 백사장을 보다가 흑사장을 보니 새로운 맛은 있지만 하얀 모래가 주는 깨끗한 멋은 없었다.
여기에도 섬 중앙에는 울창한 수림을 자랑하는 산악지대로 구름이 고봉을 감싸고 있는 그런 산세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런 모양새가 화산섬의 일반적인 특징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남태평양의 화산섬이 모두 그러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빌린 렌트차를 몰고 파피 테 시내로 향하였다. Paa'a 국제공항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오후 1시경이었는데도 시내는 역시 번잡하였다. 제일 곤란한 게 차를 파킹 하는 것인데 잘못 세워 놓았다가 딱지라도 떼게 되면 그것도 재수 없는 일이라 파킹 머신에다 100프랑 동전 하나 넣으니 30분 주차 영수증이 나온다. 그걸 차 안 대시보드 위에다 바깥에서 잘 볼 수 있도록 올려놓으면 된다.
위로부터 하나씩 읽어보면 우체국이 있고, 부강 빌 공원이 있고, Tarahoi 광장이라고 하는데 여기가 옛 Pomare 왕국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옛 왕궁은 지금은 총독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Presidence는 시청사 건물이 있는 곳이고, 경찰서가 있고, 이름이 Paofai 개신교회로 1818년 최초로 세워진 개신교회 터위에 현재의 새 교회건물이 세워졌다고 한다. Reine Marau는 타히티 포마레 왕조의 마지막 왕인 Pomare 5세의 왕비로 그녀의 거주지가 있다고 하는데 가 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초에 세워진 노트르담 성당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도 꼽추 콰지모도 - 영화에서 안쏘니 퀸으로 기억되는데 - 가 사는지 어떤지는 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차를 길가 self 파킹장에 세워놓고 중앙통 거리를 걸어 보았는데 서로들 어깨를 부닥치지 않고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출출한 배를 채우려고 만만한 맥도널드를 찾아갔는데 매장을 꽉 채운 그 인파에 놀라 식욕이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관광객들은 그들대로 중앙통 거리를 활보하며 여행을 즐기고, 현지인들은 그들대로 바쁜 삶들을 살아가는 Papeete 중앙통 거리에서 밥집을 찾아 헤매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Papeete 중앙통을 빠져나와 북서부 해안도로를 달렸다. 지도를 보니 Mahina 마을에서 위로 톡 튀어나온 해안에 무언인가 있을 것 같은 감이 들어 해안도로에서 빠져 Mahina 해변으로 내려갔다. 여행서에 가 볼만하다고 소개된 관광 장소는 아니었지만 왼쪽으로 빠지는 길이 혹같이 툭 튀어나온 해변으로 연결되어 있어 최소한 시원한 바닷가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주차해 놓고 카메라와 캠코더만 들고 해변 공원으로 들어갔다. 짐작대로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해변이 있는 공원이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상점에서는 모래사장에 필요한 베로 된 깔개나 화려한 원색으로 된 비치가운 등을 팔고 있었다.
공원 중간에는 하얀 쇠 울타리를 세워놓고 그곳에 기념탑을 세워 놓았다. 전부 불어로 적혀 있었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 불완전하게 알아낸 내용은 초기에 태평양 전역으로 흩어진 섬으로 선교를 떠난 선교사들의 노고와 헌신을 기리며 이 곳에 그런 임무를 완수하고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의 안식처를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18-19세기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확장 정책에 최일선에 선 점령군과 함께 행동한 단체가 선교사들로 프랑스가 남태평양에 흩어진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수많은 섬들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남태평양 섬들로 흘러 들어가서, 원주민을 교화시켜 기독교를 보급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그중에서도 가톨릭 신부들의 선교 활동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일요일이라 현지 주민들과 십대들이 공원에서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 내 그늘막에는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앉아 히히덕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일상 같은 시간을 죽여 보려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해변은 아니었으나 동네 주민들이 휴일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한 곳이기도 하였다.
타히티 북서쪽 Mahina라는 해변 공원에서 만난 타히티 고등학생들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더듬거리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우리처럼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영어시간이 있는데도 외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여 영어로 무얼 물어보면 뒤통수만 끄적인다.
근방에 사는 모양으로 자전거를 타고 와서 공원 벤치에 앉아 혼자서 여유를 즐기는 모델 감을 보고, 그 옛날 고갱의 화폭에 들어앉을만한 타히티 여자로 생각되어 인증샷을 남겼다. 고갱이 찾아 헤매었을 타히티 여자가 저런 모습이었을까?
고갱(1848 - 1903)이 1899년 그린 타히티 말년의 작품으로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 크기는 94 x 73cm로 미국 맨해튼 소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재하고 있는데, 현재 그림 가치가 약 890억 원이라고 한다.
타히티 섬에 있는 고갱 기념관에는 진본 작품은 하나도 없고 전부 모작만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타히티에서 생활한 1891- 1903년 10년 동안(1893- 1895년 2년 동안은 다시 파리로 나가서 거주)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관계로 돈을 마련하기 위해 타히티에서 작품이 완성되자마자 파리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고갱이 타히티에서 파리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남아 있다.
<내가 내 그림값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희소가치가 생기도록 하기 위해 내가 멀리 떠났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리지 않았소? 매상고 총계는 24,640프랑이었소. 이 중 실제로 내가 받은 것은 1,370프랑이고 나머지는 모두 빚에 넘겨 버린 것이오. 이것저것 떼고 내 손에 들어온 현금은 460프랑이었소. 그 많은 그림값이 460프랑이라니!. (중략) 47살이나 된 지금 나는 가난 속에 빠지고 싶지 않소. 그러나, 곧 그렇게 되어버릴 것 같소. 내가 쓰러진다고 해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 일어켜세워 주지는 않을 것이요.>
그의 예측대로 고갱은 8년 뒤 1903년 5월 8일에 55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병마와 가난 속에 살다가 타히티로부터 약 1500km 떨어진 Marquesas 제도의 Hiva Oa라는 먼 외딴섬에서 외로이 숨을 거뒀다.
그 Mahina 해변공원에서 만난 타히티 처자는 17세 고등학생으로 까무 짭짭한 피부색이 고갱이 그토록 탐닉했던 그 color가 혹시 아니었을까? 타히티=고갱이란 방정식을 만들어 타히티는 그를 팔아서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이름값을 날리고, 고갱이란 가난 속에 핍박을 받아가며 유럽 선진 문명을 탈피하여 자연의 원시적인 색채와 구도를 추구했던 실패한 화가를 내세워 오늘도 고갱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타히티 관광을 상품처럼 팔고 있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