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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Mar 09. 2019

지노 배낭여행기 - 남태평양편 33

타히티(Tahiti)에게 작별을

2017년 6월 13일(월) 맑음



    렌터카로 섬 일주


타히티 본섬 약도

전편에 이어 계속해서 차로 섬을 둘러본다. 북부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Mahina에서 길을 빠져 해안 공원까지 내려가서 현지 주민들은 어떻게 휴일을 보내는지, 타히티 고딩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괜찮은지, 현지인들을 제한적으로 만나 보면서 나름대로 타히티섬 현지인의 일상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100년 전 고갱이 찾아 헤매었을 뻔한 그런 모델을 우연히 만나 메모리 칩에 담아 보기도 했다.



 

    아름다운 겟세마니 성당


도로변에 위치한 성당

Mahina에서 다시 해안도로를 타기 위해 좀 전에 빠져나왔던 그 길을 반대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빨간 지붕과 밝은 핑크색으로 벽을 장식한 성당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도로가에 있어 반대편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정면 사진을 담았다.



겟세마니성당 입구

교회당 이름이 겟세마니(Getesemane)이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 마지막 밤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 그의 마지막 기도를 올렸던 그 동산이 아니던가.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바로 코앞에 죽음을 앞둔 그의 기도는 순종의 고백이었다. 설교 문중에 겟세마니 동산과 에덴동산을 종종 비교하는데,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선악의 과실을 탐한 불복종과 맹종의 동산이라면, 겟세마니 동산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의 동산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판의 연도를 보니 1931-1936년에 축성된 성당으로 그렇게 오래된 건축물은 아닌 것 같다. 먼 나라 이스라엘의 감람산 겟세마니 동산을 여기 타히티 북부 해안도로에서 만나다니, 이는 아마도 언젠가는 겟세마니 동산을 직접 두 발로 올라 그가 밤새워 기도하며 흘린 눈물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계시(?) 일련 지도 모르겠다. 계시는 무슨? 이는 순전한 자뻑으로 언젠가는 이스라엘 배낭 여행기를 쓰고 싶은 나의 바람에서 비롯된 끝없는 나의 욕망에서 분출된

magma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검은 모래로 이어진 해변

왼편으로 남태평양 바다를 끼고 북부 해안도로를 타고 달려가다 보면 바다가 가까운 해변에서는 파도소리가 여행객을 유혹한다. sailing에서는 바람을 leeward와 windward로 구분한다. leeward는 바람이 불어 가는 곳으로 <풍상>이라고 번역되고, 반대로 windward는 바람을 맞는 곳으로 <풍하>라고 한다. 북부 해안은 windward에 해당되는 곳으로 바람이 세게 불어오는 곳으로 파도가 매우 거칠다.


역광으로 잡은 해안으로 금세라도 하늘이 노할 것 같다





   Tapahi Hill 전망대에서


Tapahi Hill의 구글지도

따로 전망대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언덕처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멋진 바다 풍광을 조망할 수 있었다. 위치는 Mahina에서 동으로 조금 떨어진 곳이다.


Tapahi 이정표로 차가 서너대 정도 파킹할 자리가 있다


Tapahi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쪽 해안


Tapahi 해안에 우뚝 솟은 바위섬에 나무 두 그루가 해픙을 맞으며     힘찬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동쪽 해안가로 곧 저쪽으로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른 마을로 접어들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정확한 위치를 생각해 내려고 해 보았지만 힘들었다. 북부 해안도로에서 우회전하여 남쪽으로 접어든 것 같았다. 타히티섬에는 수도 Papeete에 전 주민의 70% 이상이 모여 살기 때문에 Papeete 말고는 큰 마을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차를 몰고 주마간산식으로 다니다 보니 현지인과의 접촉할 기회도 자연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 거리의 교통 순경


바다가 가까운 해안도로에서는 바위에 깨어지는 파도 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부르면 차를 세우고 달려가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섬의 해안도로를 타고 있었다


북부 해안도로의 동쪽 끝부분으로 파도소리가  늘상 사람을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다


섬 중앙의 높은 산에는 안개구름으로 자욱하고


현지인의 주거지가 근처에 있었다. 거의 슬래트 지붕으로 바닷가의 매서운 바람을 감안해서 그런지 집은 낮게 지어져 있었다



물가에 반뜻하게 조성된 곳을 찾았더니


물가에 조성된 관광 호텔같았다. 물가와 정원 손질이 어느 곳보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교회당 건물로 지붕은 모두 빨간 색으로 되어 있었다


간이 선착장겸 pier로 저 끝에서 낚시질도 가능할  것 같다


때론 산으로 치달은 해안 도로

해안 도로가 항상 물가로만 나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론 바다를 버리고 산으로 치달은 때도 있었다. 산길은 좌우로 녹음이 짙은 울창한 숲으로  높이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험한 산세를 자랑하곤 하였다.


산 중턱에서 바라본 산세로 산들의 연속이다


물가에서 바라본  섬 중앙부의 산세들로 거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호수같은 바다에서 아웃리거 커누로 물놀이를 즐기는 현지인들. 아웃리거란 카누 왼편에 달아 놓은 나무판으로 거센 파도에 커누가 전복되지 않게 평형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Water Garden Vaipahi


정원이 있는 위치가 남부 해안 도로  Mataira 가기 전에 있다


물의 정원이 있는 Vaipahi


고갱의 기념관이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Vaipahi 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해가 넘어갈 오후 5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고갱 기념관이 보수공사로 들어가 볼 수가 없다 하기에 일찍 감치 접어 놓았기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수상 레저 카누, 페달, 카약, 패들 대여소


물가에 잘 조성된 가든


물가에 설치된 카약 또는 커누 거치대


물가의 풍광 또한 예사롭지는 않았다. 타히티 본섬 남부 해안의 경치


중국 산수화같은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고


현지인 거주 마을로 잠깐 들어가 보았다

해안 도로에서 잠시 빠져나와 길 따라 현지인 주민 마을로 들어가 보았다. 집들이 드문 드문 잎이 커다란 열대나무들로 숨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넉넉한 살림살이는 안되여 보이고, 전혀 오지도 않았고 온 적도 없는 곳으로 들어온 이방인을 한껏 경계하는 눈치였다. 우리들의 옛날 시골처럼 밥을 짓는 아궁이가 집 울타리 쪽으로 놓여있어 장작 같은 나무로 취사를 하는 것 같았다.


현지인이 거주하는 마을로 들어갔다가 마주친 쭈글이 견공. 얼굴부터 몸전체가 쭈글쭈글하다


마을 곳곳에 야생 바나나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마을 뒷길은 먼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험상궂은 날씨로 먼 산의 봉우리는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리고


섬 중앙부의 높고 깊은 골짜기


해안가에서 한 눈으로 훤히 보이는 섬으로 나중에 알고보니                       Motu Mapeti Hotel이 있다고 한다



우연히 마주친 타히티판 <길구와 봉구> 봉구 저녀석은 노래는                      어찌 잘 하는지 궁금하다





   고갱이 타히티로 간 진정한 이유는?


이 편을 포스팅하기 위해 여러 기록물을 찾아 읽어가다가 아주 흥미스러운 한 대목을 발견하였다. 1960년 초에 한국인으로서는 첨으로 세계 여행에 올랐던 김찬삼 교수의 제3차 여행집 타히티 편에 이런 짤막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서구 문명의 몰락을 부르짖는 19세기 말엽은 타히티 섬에선 포마레 왕조가 망하려고 할 때였다. 이런 때 화단의 귀재라고 불리던 고갱은 프랑스 정부의 문화 사절로서 타히티에 왔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대로 자발적인 개인자격으로 타히티로 건너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타히티의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고 그리기 위해 프랑스 교육부와 미술 부처의 서신들을 지니고 타히티로 떠났던 것이었다. 그때가 고갱이

43세였던 1891년 한여름 6월이었다.


   소설 <달과 6펜스>

타히티를 포스팅한 글 중에 빠짐없이 올라오는 소설책이 영국 서머셋 모음(1874-1965)이 쓴 <달과 6펜스>란 소설로 고갱보다 26년 뒤에 태어난 영국 작가가 고갱의 굴곡 많은 일생을 참조하여 완성된 작품이지만 고갱의 일생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게 별로 없다. 영국 작가가 철천지 원수 같은 프랑스인의 일생을 모델로 작품을 쓴 것도 희한한 일이지만, 마치 이 책의 전개 스토리처럼 고갱의 삶이 세속의 문명을 거부하고 원시성을 추구한 천재적인 화가로 잘못 인식될 소지가 많아 고갱의 삶을 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소설책이다.


    고갱의 연도별 여자들

고갱의 연도별 동거자를 세부적으로 열거해보면,

1848년: 프랑스에서 출생

1873년:25살에 덴마크 태생의 부인과 결혼하여 별거할 때까지 5명의 자녀를 초스피드로 생산

1884년: 조강지처 프랑스 부인과 별거 시작

1891년: 타히티에 오자 마자 흑백 혼혈의 매춘부인

테후라와 동거하였다. 동시에 13살의 어린 나이인 테하아마나란 섬처녀를 꼬드겨 다시 파리로 나가기 전까지 현지처로 데리고 살았다.

1893-1895년: 파리로 나가서 2년 동안 거주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자바계 여자 Anna라는 여인과 동거하였다. 꽃뱀 같은 Anna가 모든 것을 빼돌리고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타히티섬으로 돌아왔다.

1895년: 다시 타히티로 돌아온 고갱은 옛 여인 테하아마나를 찾았지만 그녀는 성병과 심장병을 지닌 고갱과 살고 싶어 하지 않아 도망쳐버렸다. 결국 다른 여자를 찾아 이번에는 조숙한 14살의 파우라를 만나 섹스 파트너로서 그리고 화폭의 모델로서 양쪽으로 이용해 먹었다. 그래도 1901년 마르케사스 제도로 건너가기 전까지 파우라와 동거한 6년이 고갱에겐 제일 행복했던 결혼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 기간에 고갱의 대표작으로 꼽는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했다고 한다.


고갱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파우라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아들이 장성하여 어부가 되어 홀로 남은 모친 파우라를 봉양했다고 한다. 고갱으로부터 받은 유산이나 원조는 한 푼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소문은 그 아들이 고갱이 죽고 나서 걸인이 되어 동냥을 하면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고 한다.


1901년:마르케사스 제도로 여자를 찾아갔다고 했는데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여자의 정체를 잡을 수 없다. 잘못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고갱은 1891년 타히티로 건너오면서부터 마르케사스 제도로 가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렇게 가고 싶어서 말년에 그리로 간 모양이다.

1903년:마르케사스 제도의 섬 Hiva Oa에서 임종을 지켜봐 주는 여자도 없이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대신에 시중을 들던 남자 사환이 남아서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고갱의 묘지는 마르케사스 제도의 Hiva Oa섬에 있다(인터넷사진)

     



    타히티로 건너간 진짜 이유


고갱의 일생을 저술한 대부분의 작가는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학도들로서 고갱의 굴곡 많은 인생사보다 시대별로 변모해가는 그의 작품 분석에 공을 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피오넬라 니코시아의 <고갱 : 원시를 갈망한 파리의 부르주아>나 데이비드 스위트먼의 <고갱, 타히티의 관능> 같은 책처럼 고갱이 단지 순수한 낙원을 찾아서 타히티로 갔다는 식으로 마치 고갱이 문명을 배격하고 원시성을 추구한 순수한 화가로 묘사하고 있다.


영국 리즈대학의 미술교수였던 그리젤다 폴록은 주로 19세기 근대미술사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미술사학 자이다. 그녀가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라는 책에서는 기존의 분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고갱을 서술하고 있다.


고갱이란 백인 남성이 프랑스의 식민지인 타히티에서 피식민지 유색인종 원주민 여성에게 갖는 선입견이란 게 일반 유럽 백인 남성들이 갖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선입견이란 게 보통 성적 판타지를 뜻한다. 타히티에 오자 마자 어린 섬처녀를 꼬드겨 동거한 팩트를 이런 성적 판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서 고갱이 늦은 나이인 43세에 조강지처와 어린 5남매를 팽개치고 타히티로 건너간 이유를 <전략적 선택>으로 출세 화가가 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갱의 대부분의 작품은  본인은 원시주의를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관광주의>와 <식민주의>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 부르조아적 물질주의와 퇴폐주의라는 틀속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광주의>란 것은 근대 도시에서 여가를 즐기는 중산층들이 <식민주의>를 통해 연결된 다른 나라들을 방문이나 여행하며 문화적으로 소비 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고상한 언어로 평가된 고갱의 작품 세계를 비전공자가 어찌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만은 그래도 보고 읽고 들은 게 있는 나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한마디 더하고 싶다.

고갱은 조강지처와 5명의 자식을 둔 가장으로서 -사후에 인정받은 미술성은 차지하고 - 본분을 잊고, 자신의 출세 목적으로 전략적 도피성 의도로 식민 지역인 타히티로 탈출하여 가족을 팽개친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화가일 뿐이다.





   Mataiea의 Tehoro 포구


가다보니 선착장이란 이정표를 보고 그리로 찾아 갔다

오래간만에 보는 마을로 황혼이 스며들기 시작한 저녁때에도 많은 주민들이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축구 경기를 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Motu Mapeti Hotel이 지척에 놓여 있었다


해가 구름 속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선착장 Tehoro에서 조정 연습을 하고 있는 주민들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관계로 커누나 조정 등으로  해양 민족의 기질을 잃지 않고 오늘도 어제처럼 바다를 주름잡고 있다.


조정 연습에 열심인 현지인들




    타히티에서 Sunset으로 마지막을


타히티의 노을 1

묻고 싶다. 타히티라서 노을이 아름다운 것이냐? 아니면 노을이 그냥 노을이라서 아름다운 것이냐? 이것을 알려면 소위 말하는 노을 마니아에게 물어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일인데......


타히티의 노을 2

2005년 <왕의 남자>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여 일약 스타 감독으로 입지를 굳힌 이준익 감독이 2018년 박정민과 김고은을 주연으로 찍은 영화가 <변산>이란 작품으로 노을 덕후 선미(김고은)의 눈으로 별 볼일이 없이 청춘을 살아가는 20대들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타히티의 노을 3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이런 시 한 구절로 고향의 척박함을 노래한 쥔공 씸빡 학수(박정민)는  고향 변산반도에 있는 부안을 떠나 서울에 있는 편의점에서 알바로 일하며 래퍼를 꿈꾸는 6년 차 무명 가수. 어느 날 고향으로부터 아버지가 위급하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가기 싫은 발걸음을 고향으로 향하는데...... 이유는 건달 생활과 노름으로 자기와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의로 상면하기 싫었던 이유가 있었다.



타히티의 노을. 노을 마니아가 좋아할까?

고향 아버지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찾아 간 학수는 병원에서 선미 아버지 병수발을 들고 있던 노을 마니아가 된 선미(김고은)를 마주하게 되고, 곧이어 고향을 떠나 음대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첫사랑 미경(신현빈)도 상면하게 된다. 고등학교부터 학수를 짝사랑했던 선미는 학수로부터 알게 된 노을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게 되어 <노을 마니아>란 책을 출판하여 오늘의 작가상을 받아 신진 작가가 되어 있었다. 학수에게 걸려 온 그 전화 한 통이 선미의 머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 학수는 선미를 무작정 경멸하게 된다.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보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평생 철저지 원수로 살아갈 아버지(장항선)와 그의 죽음 전에 진심으로 화해하여 서로를 끌어 앉는 진정한 가족애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웃음과 눈물로  때로는 분노로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청춘의 희망 메시지를 보고 싶다면 강추.



아름답기도 하고 또한 쓸쓸한 타히티의 낙조

가슴이 시릴 만큼 멋진 타히티 노을 속에서 더욱더 혼자임을 불쑥 느끼게 해주는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1951년생인 일본 여성 singasong writer인 이츠와 마유미(五輪眞弓)가 1980년에 발표해 초대박을 친 고이비또요(戀人よ)란 노래다. 떠나갈 연인에게 제발 옆에 있어 달라고 부질없는 부탁을 해보는 가사가 서사적으로 되어있어 운치가 있다.

https://youtu.be/RXzizSGapiY  <—— 여기를 콕​




타히티의 푸른 노을

한 곡으로 부족해서 트럼펫 연주곡으로도 들어 보았다. 나도 조금만 더 연습해서 이 곡을 녹음해보려고 한다.



https://youtu.be/cWV9-4K4u58​  <— 여기를 쿡


타히티의 아름답지만 또한 쓸쓸한 노을

이츠와 마유미(五輪眞弓)의 고이비또요(戀人よ)를

한국의 여가수 린애가 편곡하여 <사랑 후愛>란 타이틀로 2002년에 발표하였다. 원곡을 너무 많이 변주하여 불렀기에 원곡을 아는 사람들에겐 별 호평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았다.


https://youtu.be/oqcSoqhysEQ​ <——- 여기를 콕​



이별후애(愛)
-린애


언제쯤이면 괜찮을까
잊으려는 마음마저도 잊을까
니가 없다는 것조차
지우고 나면 편안해 질까
이별이란 건 참 우스워
거울 속의 내게 거짓을 애기해
더는 그립지 않다고
말하고 나면 눈물이 흘러
어디 있는지 무얼 하는지
아직 난 하루 종일 널 찾고 있는데
사랑했던 기억 그것만으론
남은 날들은 너무 서글픈데
눈을 뜨는 게 두려워
거짓스러운 웃음으로 날 속여도
세상 모든 것 속에는
네가 숨 쉬고 다시 널 그려
어디 있는지 무얼 하는지
아직 난 하루 종일 널 찾고 있는데
헤어졌다는 것 그것 마저도
잊어버리면 웃을 수 있을까
보고 싶은데 그것뿐인데
꿈에도 소원은 늘 너 하나뿐인데
사랑했던 날들 정말 너에게
쉽게 잊힐 추억일 뿐이지(2002)



타히티의 노을

노을 덕후 선미가 이곳에 와서 타히티의 저 노을을 보았다면 뭐라고 한 구절을 남겼을까?  화가는 여기에서 화폭에 정열의 타히티를 담았고, 소설가는 아름다운 문체로 타히티를 노래했을 텐데, 어중간한 나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노을에 관련한 시 한수를 찾아 올릴 뿐이다. -Jh-


             노을 -최영철-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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