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노킴 Mar 22. 2019

지노 배낭여행기 - 남태평양편 34

절해고도 이스트섬에서(1)

2017년 6월 13일(월) 맑음



   절해고도(絕海孤島) 이스터섬으로


절해고도(絕海孤島)가 될 기준이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있어야 하는지는 잘 몰라도 가장 가까운 섬이 바로 전편에 소개했던 Bounty호 해상반란으로 반란자들이 숨어 들어간 Pitcairn(핏캐언)섬으로 약 2100km 떨어져 있고, 가장 가까운 육지가 남미대륙의 칠레 센티아고까지 3700km라고 하니 그 정도면 자격이 충분치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이스터섬으로 연결되는 비행기편은

- 매일 운항되는 편은  이스터섬 -칠레 산티아고

- 일주일 한번은 타히티 - 이스터섬 -칠레 산티아고로 바로 내가 이용한 뱅기편이었고

- 일주일에 두편은  이스터섬 - 페루 리마로 가는 뱅기가 있다. 세 뱅기 다 요금이 틀려 수시로 요금을 체크해 보아야 한다.  


이스터섬에 착륙하기 직전 섬의 왼편 꼬리 부분이 보였다



칠레의 대표적인 국유 항공회사 LAN



 

   이스터섬의 역사


이 섬을 부르는데 3가지 다른 호칭이 있다.

Rapa Nui: 섬 원주민들은 라파누이라고 부르는데 커다란 땅이란 의미다.

Isla de Pascua: 1888년 섬을 합병한 칠레인들은 이슬라데빠스쿠아라고 부른다. 스페니쉬로 이스터섬이란 뜻이다.

Easter Island: 유럽인이나 비스페니쉬 관광객들은 걍 이스터섬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유럽인 발견자는 1722년 일요일 부활절에 네덜란드 해군제독 Jacob Roggeveen이 섬에 상륙하여 약 1주일간 체류하였다. 그 당시에는 온전하게 서있는 Moai 석상이 몇 개 있었고 섬 외부와는 철저히 격리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상륙한 유럽인은 1758년 프랑스 탐험가 La Perous로 그가 상륙하였을 때에는 인구도 불어나고 상황이 나아졌다고 한다. 스페인 탐험가 Pellipe Gonzales는 1770년 섬을 발견하고 상륙하였다. 태평양의 풍운아 제임스 쿡선장도 그의 2차 원정때인 1774년 원정대를 이끌고 상륙하였다. 와서 보니 Moai 석상이 많이 파손된 걸로 보아 부족간의 내전이 있었던 걸로 추정하였다..



이스터섬 생수 선전 포스터

그후 외부와의 접촉이 전혀 없다가 1862년 섬을 급습한 페루 노예상인에게 섬주민 약 천명이 잡혀가서 칠레의 여러섬에서 guano(인광석) 채취 노동에 혹사당하고 대륙의 전염병에 점염되어 약 90%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860경에는 섬에 생존하던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전향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외부와의 무역 통상은 1870년대 프랑스 무역상인에 의해 처음으로 wool이 거래되었고, 건강한 노동인력이 타히티로 건너가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1877년 섬에 체류하던 프랑스 선교사가 섬주민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긴장이 고조되어 섬주민이 겨우 110명 정도로 감소하기도 하였다. 볼리비아와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칠레가 1888년 칠레 영토로 합병 선언하였다. 칠레 정부의 압박에 대항하여 현재도 섬 원주민들이 독립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전통 춤을 볼수 있다는 식당 선전 포스터


스쿠버 다이빙을 선전하는 포스터




   크기는 제주도의 1/10 정도


섬 주거지 약도

 면적은 제주도 크기의 1/10 이지만 주거지는  전체에 널려있는 것이 아니고 비행장 옆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비행장이 끼여있는 Mataveri, 식당과 여행사, 차렌탈 회사가 한집 건너 촘촘하게 들어  Moeroa  중앙통이라고 할만한 Hanga Roa 주거지역이다. 하지만, 유적지가 섬전체에 이리저리 널브러져있어 걸어서 구경하기에는 쉬운 곳이 아니다. 돌아다니려면 타고 다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주거지역의 한 모습


주거지역에 접한 바닷가 해안


제주도 해변처럼 거무틱틱한 현무암들로 가득차고


별 특별한 것도 없는 조그마한 섬마을이다


비포장도로가 많아 사륜구동 차량이 흔하다


돌로 쌓은 담벼락은 제주도의 그것과 유사하다


거주 지역에서 유적지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주거지 옆에는 사진처럼 농작물을 키우는 밭도 많다


이렇게 돌담만 찍으면 제주도인지 이스터섬인지 분간이 안된다


제주도라고 해도 곧이 들을만한 구멍이 숭숭한 화산돌로 쌓은 담벼락


마을 중간에 자리한 목각 조각상으로 moai상하고는 이미지가 다르다


화산돌로 쌓은 벽과 이엉 지붕의 전통 가옥




   더럽게 비싼 유적지 입장권


섬 유적지 입장권. 물경 미화 80불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자 마자 주인장은 마을에 있는 유적지 관리공단에 가서 입장권을 사라고 하였다. 그게 없으면 유적지 입장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갔더니  년전에 미화 60불하던 것이 80불로 인상되었다. 너무 비싸다는 감이 들었으나 섬에 들어  이상 유적지를 안보고 가기에도 뭐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구매하는데 파는 녀석이   더뜨서 염장을 지른다. 입장권을 분실하면  사야 하니까  보관을 잘해야 한다 하길래, 내가 표를 샀다는 영수증을 해달라고 했더니 입장권이 영수증이라며 영수증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마디만 해주고 돌아섰다. 내가 만일 입장권을 분실하면 절대로 다시 사지 않고  이상 안보고 집에 가겠다고 악담을 해주었다. 집에 와서 보니 분실하지 않으려고 셀폰케이스 안쪽 깊숙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이틀동안 구경하고 다녔더니 입장권을 사지 않고도 유적지를 돌아   있는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유적지마다 현지인 관리자가 검표를 하는데 9-5 pm 까지만 하고 오후 4:50 정도되면 근무자를 퇴근시키는 차량이 섬을 돌면서 검표원을 태워 철수시키니까 오후 5 이후에 가면 맘대로 들어가서 구경할  있었다. 그러나, 모아이 생산공장지로 유명한 Rano a Raraku 같은 곳은 5 퇴근하면서 2 3중으로 바리케이트를 쳐놓아 통제를 하니까 들어  보기가 힘들다.


섬 전체 약도

위에서 보여준 거주지역은 삼각형 모양을 한 섬에서 왼쪽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다. 삼각형 위 꼭지점 좌우로는 차길도 없어 온전히 발품을 팔아야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나같이 이틀정도 가지고는 가 볼 엄두도 못낼 그런 곳이다.


거주지 약도

결국 조그마한 4륜구동차를 한대 렌트해서 도착 첫날 바로 유적지로 향했다.





      Ahu a Kivi


이스터섬의 다른 모아이들은 모두 바다를 등지고 내륙쪽으로 쳐다 보는데 이곳의 모아이들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원주민들에 따르면, 여기 있는 모아이들은 이스터섬을 지키는 7인의 왕자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이스터섬을 지키는 7인의 수호신인 셈이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찾기는 수월하다


Ahu a Kivi 경계를 쌓은 돌담
Ahu a Kivi 입간판과 모아이상

Ahu란 모아이상들이 서 있는 제단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아이상들이 서있는 곳이 원주민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장소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그런데 그런 신성한 제단이 섬 전체를 삥 둘러가며 곳곳에 남아있어 무슨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그렇게 많은지 의문스러웠다.


Ahu a Kivi에 있는 7개의 모아이상

아직까지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섬에다 이런 거대 석상을 세워 놓았는지 명쾌한 답을 제시한 고고학자도 없다. 단지 각자가 주장하는 가설만이 몇 가지 존재할 따름이다.



Ahu a Kivi 입구에 서있는 목각 조각상으로 얼굴 이미지는 모아이 석상과 비슷하였다. 입구에는 기념품과 간단한 음료수를 파는 매점이 하나 있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섬 전체에서 Ahu a Kivi가 있는 위치를 보여준다


7인의 왕자라고 불리우는 Ahu a Kivi 모아이상


정면으로 일렬 종대로 세워서 촬영

7개 모아이상을 한 컷으로 담아보니 개별의 모아이상 형태가 너무 작게 나와 충분하게 감상할만한 사이즈라 아니라 번호를 부여하여 개별 모아이상을 확대하여 보기로 하였다.


1번 모아이상

모아이상의 공통된 포즈는 뒷방 영감쟁이처럼 두손을 뒤로한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2번 모아이상

역시 1번과 유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얼굴 모습도 어찌보면 same family에서 나오는 닮음꼴이 보이는 것 같다.


3번 모아이상

하나 하나 모아이상을 보면서 나혼자만의 유추한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예전에 이집트 배낭여행길에서 유적지중의 한 군데인 룩소르 서안지역에 있는 <왕가의 계곡>이란 곳에서 그들의 무덤에 그려진 벽화를 구경하였는데 모두가 비슷한 그림이었다. 그 당시 인구도 많지 않을 그 때에 화가라는 명장 칭호를 받고 권력자/통치자의 명령으로 벽화를 그린 화가 그룹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하면 같은 그룹의 장인들이 이 무덤의 벽화 작업을 끝내고 나면 다음은 저 무덤의 벽화 작업을 당연히 했을 법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남겨논 벽화의 그림이 대동소이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하고 유추해 본다.


4번 모아이상

같은 논리로 이스터섬의 모아이상 제조 장인도 소수의 선택된 그룹이 맡아서 작업을 했기에 그들의 서있는 포즈나 얼굴 모습들이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본다.


5번 모아이상


6번 모아이상


7번 모아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 거주지 Hanga Roa


이런 길은 제주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분화구였을 같은 작은 봉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





  Puna Pau Trail


Puna Pau trail 입구

Puna Pau란 트레일 입구이다. 모아이 석상은 보이지 않고, 군데군데 푸른 잔디밭에 박힌 시커먼 화산석들만 간간이 눈에 띄였다. 트레일을 유유적적하게 걸을만한 시간도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 입구를 지나 트레일에서 사진 몇 장을 훔치고 금방 돌아섰다.


Puna Pau 트레일 약도

여기서 채석된 붉은 돌로 만든 모아이 모자를 pukao(푸카오)라고 한다. 섬에 서있는 모아이상들에게 전부  모자가 씌여져 있는 것은 아닌데 일부 모아이상들은 돌로 만든 붉은 모자를 의젓하게 쓰고 있다. Puna Pau에서 모자를 만들어  내륙 각지로 운반되었다고 한다. 현재 섬에  900여개의 모아이상이 남아 있는데    100 모아이상만이 푸카오 붉은 모자를 쓰고 있다고 한다.


Puna Pau 의 흙들이 붉은 색이다

Puna Pau가 분화구였다고 한다. 여기서 채취한 화산석이 붉은 색을 띠어 모아이상의 모자를 만드는 석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모아이상이 쓰고 있는 붉은 색 돌모자 pukao

붉은 모자의 무게가 보통 1톤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12톤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 무거운 모자를 어떻게 모아이상에 덮어 씌어졌는지 그것도 궁금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모아이상이 제조되어 세워지면   높이까지 모래나 흙을 사선으로 채우고  사선위로 pukao 돌모자를 굴려서 모아이상에 씌우고  다음 채운 모래나 흙을 제거했을 것이라고 한다.





    Ahu Anakena


전설에 따르면 이스터 섬 최초의 왕인 호투마투가 상륙한 곳이 바로 이 아나케나 해변이고, 이를 기념하여 만든 모아이가 아후 나우나우(Ahu Naunau)라고 한다.


Ahu Anakena 입간판


Anakena 위치를 보여주는 약도


야자수 나무가 해변가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런 야자수들은 옛날부터 내려온 것들이 아니고 최근에 심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야자수는 새로 심어 가꾼 것으로 17-8세기에는 무슨   이유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이스터섬에 야자수 숲이 사라진 이유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첫째는, 원주민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제작이나 모아이상을 내륙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야자수 통나무를 굴림틀로 사용하여 나무자원이 고갈되었다고 한다. 다른 반론은, 나중에 상륙한 유럽인에 의하여 주민착취와 자원착취가 자행되었는데, 유럽인이 상륙할  배에서 같이 내린 쥐들에 의하여 야자수가 황폐되어 나무숲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유를 밝히지 못하고  가지의 가설이 서로 옳다고 경쟁하고 있다.


실루엣으로 잡아 본 Anakena 7개의 모아이상


Anakena에 있는 돌무지



야자수 나무사이로 보이는 모아이상


역광으로 잡아본 7개의 모아이상


모래밭이 있는 유일한 바닷가로 수심이 얕아 해수욕도 할 수 있다

이런 완만한 경사가 있는 해안가가 이스터섬에는 별로 없다고 한다. 이스터섬 주변의 경사가 심하여 남태평양의 다른 섬처럼 완만한 해안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Anakena 해변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고 한다.


야자수 숲속의 모아이상


이곳 저곳에 널브러져있는 돌무지


늠름한 7인의 모아이상



7개의 모아이상 뒷태


홀로 서있는 모아이상

7개 석상 뒤로 하나의 모아이가 홀로 서 있다. 바로 이 모아이가 이스터섬에서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고 하는 아후 아트루 후키(Ahu Ature Huki)라고 한다.



7인의 왕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 가보자.


7개의 Anakena 모아이상

일렬종대로 번호를 부여해서 하나씩 크게 보도록 하자. 측면에서 보니까 오른쪽 귀가 길게 선명하게 보인다.


1번 모아이상

하나의 가설로 이스터섬에서 원주민들이 자취를 감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래의 초기 섬거주자들은 귀가 짧은 소이족이었는데   남미대륙에서 건너온 귀가  장이족들의 출현으로  부족간의 전쟁으로 장이족이 승리하여 모아이상도 그들을 닮게 귀가 크고 길게 제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남미대륙의 장이족 출현을 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2번 모아이상

참고로 사진에서 모아이상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모아이상 얼굴에 묻은 하얀 새똥의 위치에 주목하여 보면 차이를 금세 느낄 수 있다.


3번 모아이상

현재까지도 모아이상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죽은 통치자(왕)를 추모하여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부족의 안전을 염원하는 수호신이라고도 하는등 여러가지 가설이 있다.


4번 모아이상

자세히 관찰해보면 1번 모아이상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아있다. 돌모자 pukao까지 닮아 있다.


5번 모아이상

앞선 모아이상들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6, 7번 모아이상

이 둘은 마모가 심해 전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귀도 거의 보이지 않아 이들이 소위 말하는 소이족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1-5번 모아이상을 한자리에



아후 아트루 후키(Ahu Ature Huki)를 역광으로 잡아보고


7인의 모아이상을 해변쪽에서 잡아보니 해변의 모래밭이 보였다





    Te Pito Kura


Te Pito Kura 위치

Te Pito Kura는 Anakena를 지나 오른쪽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다. 차도가 나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Te Pito Kura 전경. 오른쪽으로 보이는 움막집이 관리인 사무실

여기서도 입구쪽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있는 모아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서도 입구에서 몇 장의 인증샷만 훔치고 돌아서 버렸다. 그런게 잘못이라는 것을 포스팅할 때 알아차렸으나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바닷가에 인접한 Te Pito Kura로 멀리서 보아도 모아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Te Pito Kura의 인터넷 사진

바닷가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있는 곳으로 Te Pito Kura <Navel of Light> 조선말로 옮기면 <빛의 중심>이란 뜻으로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란 말이다. 이를 Te Pito O Te Henua 라고도 하는데 <Navel of the world> 뜻으로 <세상의 배꼽>이란 말이기도 하다. 남미 페루의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gateway Cusco 고대 잉카인들은 이렇게 <세계의 배꼽>이라고 불렀다. 배꼽의 의미가 신체의 중앙에 있어 모든 것들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크다.



Te Pito Kura의 인터넷 사진 2

원형으로 돌담을 쌓고 안에다 둥근 돌을 오방형으로 배치해 놓았는데 중앙의 큰 둥근돌에 철분이 대량 포함되어 있어 나침반을 올려 놓으면 바늘이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돌에서 나오는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Mana라고 하는데 여자들이 돌맹이를 감싸고 있으면 임신이 쉽게 된다는 속설도 있다고 한다.(제주도의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그런 효과가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곳에 섬에서 통틀어 제일  모아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이 Paro라고 하는 moai인데 전체 길이가 10m 무게가 무려 80톤이 되었다고 한다.  10m 귀가 2m 차지해서 장이족을 상징한 듯하다. Paro moai 붉은 돌모자 Pukao 쓰고 있었다고 하는데 모자 높이가 2m 무게가  10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근 바닷가 전경


제주도같이 전형적인 화산섬의 경치를 선사한다


Te Pito Kura 전경


Puakatiki 분화구

섬 오른쪽 끝에는 Puakatiki 분화구가 있는데 차도로는 없고 발품을 팔아 트레일로 한참을 걸어 가야 가볼 수 있는 곳이다.





    Papa Vaka(암각화가 있는 유적지)


Papa Vaka의 위치

위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Te Pito Kura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Papa Vaka 입구

입구에 서서 바라보니 분명하게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입구에서 얼쩡거리다가 다음 유적지로 옮겨갔는데 글과 사진을 포스팅하다 다시 찾아보니 Petroglyphs를 볼 수있는 고고학적 가치가가 있는 유적지라 하였다. 건성으로 지나친 그 때를 지금에서야 후회하였다.


한국의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대곡천의 절벽 돌에 새겨진 그림으로 그런 암각화를 Petroglyphs라고 한다. Papa Vaka의 암각화는 이 섬의 초기 원주민들이 그들의 해양 문화를 돌에 새긴 암각화로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지라고 하니 담에 이스터섬을 여행할 독자들은 부디 지나치시지 말고 꼭 둘러 보시기 바란다. -Jh-


천상 인터넷에서 건져 올린 암각화 사진 1
천상 인터넷에서 건져 올린 암각화 사진 2


Papa Vaka를 에워싸고 있는 돌담

작가의 이전글 지노 배낭여행기 - 남태평양편 3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