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이스터섬에서(2)
2017년 6월 14일(화) 맑음
암각화가 있는 Papa Vaka에서 서두르다 암각화도 보지 못하고 길 따라 Ahu Tongariki로 이동하였다. Papa Vaka에서 곧장 남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면 해안가에 위치한 Tongariki를 만난다. Tongariki에는 이스터섬에서 한 곳에 제일 많은 수의 모아이상이 모여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길을 잘 포장되어 있어 쾌적하게 달릴 수 있었다. 중국인인듯한 청춘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둘이서 즐거운 듯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고고학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굴된 섬의 유적지가 약 20% 정도로 미발굴 유적지가 대부분이라는 소리로 저렇게 잡초 속에 방치된 것들도 그들의 유적지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Rano Raraku는 나중에 소개할 분화구로 여기서 형성된 돌산에서 모아이상을 제조하였기에 일명 모아이 제조공장으로 불린다.
뱃길의 안전을 염원하는 기도를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고 있는가? 그런 안전쯤이야 모아이상에게 빌어도 쉽게 들어줄 만도 할터인데...... 유럽인이 가져온 성모 마리아가 모아이 상보다 훨씬 잘 들어주는 모양이다.
거대한 석산이 모아이의 생산 공장인 셈이다. 저곳에 약 300개 정도의 미완성 모아이상이 널브러져 있다고 한다.
무려 15개 모아이상이 바다를 등지고 서있는 곳이다.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어떤 이는 마치 남성 합창단 같다고도 하는데 1960년대 쓰나미로 전부 쓰러져 있었는데 일본 모아이 수복위원회의 협찬으로 복구하여 지금처럼 서있게 되었다고 한다. 들어가는 입구에 마치 합창단의 지휘자 같은 모아이상 하나가 별도로 세워져 있어 총 16개가 있는 셈이다.
운 좋게 오후 5시가 넘어서 왔더니(사실은 5시 이전에 한번 들렀다가 Rano Raraku를 먼저 가본다고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섰었다) 관광객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 혼자서 15개의 모아이상을 독차지하였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별로 크게 보이지는 않은데 제일 큰 석상의 키가 4m가 넘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전부 쓰러져 있었는데 일본 민간기업(포클레인 중장비 업체)의 도움으로 지금같이 복원되었다. 그 보답으로 일본 남부지방 규수 미야자키의 산멧세 니치난 자연공원에 모아이상을 설치하도록 허락하여 그곳에 7개의 짝퉁 모아이상이 세워져 있어 현재 많은 일본 관광객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15개 모아이 석상을 일렬종대로 세워서 전체 사진을 찍어보니 뚜렷한 이미지가 전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를 5-6개씩 나누어 세 그룹으로 나누어 찍고, 다음에는 하나씩 정면 사진을 크게 찍어 번호를 부여하여 대조하도록 만들어 보았다. 마치 모아이상이 범죄를 짓고 섬을 탈출하는 경우에는 바로 지명수배를 내릴 수 있도록 신원 사진을 database 한 셈이다( 범죄 용의자 수배 사진을 mug shot이라고 한다). 이것이 요즘 대세로 자리 잡는 Big Data 사업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이스터섬 모아이상 Big Data platform은 여기에 깔아 놓은 셈이다.
하나씩 관상을 보도록 하자
모아이상이 응시하는 시선의 각도는 거의 동일한 것 같다. 이 모아이상에는 왼손의 손가락 모양이 남아있다.
유일하게 혼자서 붉은 모자 pukao를 쓰고 있다.
여기 모아이상들은 뒷짐 지는 포즈가 아니고 손을
앞으로 내리고 있다.
시선을 두는 눈의 각도는 거의 동일한 것 같다
두상의 눈 부분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는 걸로 보아서 15개 모아이상이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15개 모아이 상중 키가 제일 큰 것 같다. 여기서 제일 큰 모아이상 높이가 4m라고 하니 이 모아이 키가 그 정도 되는 모양이다.
두 번째 그룹을 살펴보면
옆의 5번 모아이상과 키를 보니 5번 모아이 상의 두상만한 키 차이가 난다. 역시 이것도 손을 앞으로 내리고 있다.
뒷짐을 지고 있는 형상이다. 두상의 마모가 다른 것들에 비해서 심한 편이다.
역시 7번 모아이처럼 뒷짐을 지고 있는 형상이다.
쾡한 눈과 긴 귀는 공통된 모아이 형상이다.
다시 뒷짐을 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그룹으로
쾡한 눈으로 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한쪽 눈은 세월과 풍상에 녹아 버렸다. 두상도 절단되었다가 갖다 붙인 것 같았다.
긴 귀와 코 그리고 쾡한 눈은 모아이상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두상 위부분이 평평한 걸 보니 원래는 붉은 돌 모자
pukao를 쓰고 있었는데 쓰나미 때 모자를 분실한 모양이다.
앞의 모아이처럼 쓰나미가 덮칠 때 모자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뒷짐을 지고 조용하게 빈 하늘을 응시하는 모습이 모든 것을 초월한듯한 철학자의 풍모를 느낀다.
개별 초상화 같은 모아이상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니 마치 감옥(섬도 일종의 감옥으로 보면) 속에 수감된 재소자들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희망 없이 멍한 눈으로 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모아이상들이 시원한 바다를 등지고 내륙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외면하고 있는 바다 경치가 보통이 아니다. 바람을 맞는 해안으로 쉴 새 없이 파도들이 밀려온다. 마치 그런 험한 바다 풍상을 보기 싫은 듯 돌아 서서 있는 것일까?
섬에 있는 유일무이 한 박물관으로 별로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Rapa Nui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공식 이름은 P. Sebastian Englert 고고학 박물관으로 P는 Priest(목사)의 약자로 독일 태생의 세바스챤 목사가 1935년 섬으로 들어와서 1969년 몰할 때까지 34년간 이스터섬의 문화, 문자와 고고학 발굴에 여생을 바쳤다. 그를 기념하여 1973년에 개관한 박물관으로 그가 수집한 여러 물품을 포함하여 약 15천 점정도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입장료는 없는데 월요일이 휴관이니 그 날을 피해서 가야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목각상의 얼굴 모습은 모아이 석상의 그것하고는 전혀 틀린다. 섬에서 발굴된 목각상 수가 약 천여 개라고 하는데 새겨진 얼굴 모습이 원주민들의 조상들의 그것과 흡사하게 조각되었다고 한다. 이런 목각상은 마치 조상님의 음덕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숭배되었다고 한다.
흑요석의 강도가 화산암으로 된 모아이상을 제조하는 응회암보다 훨씬 세다고 한다. 모아이상을 제조하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원시시대에는 흑요석을 날카롭게 갈아서 화살촉으로도 사용하였다.
<롱고롱고>라고 하는 원주민들의 상형문자로 폴리네시아 원주민에게는 문자란 전혀 없었는데 폴리네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이스터섬에서 유일하게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섬 원주민들이 사용하였던 문자를 rongo rongo라 하는데 아직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유적을 발견한 이래 지금까지 130년간 고고학자들이 문자 해독에 연구에 매달려 왔지만 아직도 수수께끼라고 한다. 총 603개의 다른 형태를 보이는 롱고롱고는 고고학자들에게는 여전히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형문자가 새겨진 목각판이 총 27개가 발굴되었는데 이 역시 원판은 모두 해외로 반출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것은 칠레 산티아고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원본을 본떠 만든 카피본이라고 한다.
어느 책에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여성 모아이상이 있다고. 박물관에 전시된 이 석상은 분명하게 여성으로 길쭉한 두상에 쌍수를 한듯한 가느다란 두 눈이 우락부락한 남성 모아이의 그것 하고는 확연하게 틀리고, 봉긋한 앙가슴 골이 Feminism의 상징이다. 그러나, 섬 둘레에 세워진 모아이상에는 이런 Image의 석상은 없는 걸로 보아 신분이 높은 지배층의 반쪽을 상징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이런 여성 모아이상은 섬에서 총 12개 발견되었는데 모두 섬 밖으로 반출되고(서양넘들이 뚱쳐 갔다는 소리) 그중 섬 박물관에 하나가 남아 있다. 원래는 두상 없는 몸통이 1956년 발견되어 그 몸통도 해외 반출되어 노르웨이의 오슬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가 1988년 두상이 섬에서 발견되자 오슬로에서 몸통을 반환받아 여기에 전시되어있는 것이다.
모아이상 대부분에는 눈만 쾡하게 움푹 파여있고 눈동자가 없는데 현지 고고학자가 오랜 연구 끝에 그 사연을 밝혀내었다. 원래는 섬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하얀 산호로 눈알을 깎아 만들고 눈동자는 검은 돌로 박아 모아이상에게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