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a Bora를 떠나며
2017년 6월 12일(일) 맑음
지상낙원 같은 신혼 여행지에서 다른 거 할 것도 없어서 차로 섬이나 한 바퀴 둘러보고 왔다고 하면 잘했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호텔 전용 보트를 타고 보라보라섬에서 멀리 떨어진 motu(섬)에 위치한 비싼 resort에는 발도 못 디디고 왔으니 레알 보라보라에 가봤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대신에 보라보라섬에 사는 현지 주민들의 생활상과 섬 구석구석은 보고 왔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 같다.
해안 도로를 달리다가 띄엄띄엄 서 있는 주민들 주거지를 보면 주로 차 안에서 살짝살짝 모르게 촬영하였다. 이런 짓거리도 주민들 개인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같아 대놓고 나가서 찍어 오기도 뭐 했는데, 희한하게도 차 안에서 카메라로 찍으려고 들이대면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기분 나쁜 듯이 꽝하고 닫아 버리는 사람도 있고, 멀뚱하게 이를 쳐다보며 언짢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삶의 일부를 남한테 보이는 것이 치부를 드러내 놓는 것 같아 그렇게 모두들 반응하는 것일까? 개인 프라이버시를 잠깐이라도 훔쳐본 내가 잘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감정이 전혀 없는 자연을 훔쳐보거나 사진을 찍을 때는 - 탄성을 자아내는 멋진 풍경이던, 상을 찌푸리게 하는 단정치 못한 모습이던 - 그런 미안스러운 마음은 없었다. 아마도 자연은 인간처럼 프라이버시도 없고 체면이나 자존심이 없어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연이 인간보다 몇 수 위에 있음이 분명한데 인간들이 자연으로부터 배우러 들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게 문제이면 문제일 것 같다.
섬 중앙부에 우뚝 솟은 바위산은 공항에 내려 배를 타러 선착장에 나가면서 첨으로 대면하게 되는데 찾아보니 Otemaru산이 727m, Pahia산이 661m 그리고 Ohune산이 619m로 세 개의 돌산이 연이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 개의 돌산으로 마치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런 돌산을 섬으로 들어와서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타고 돌아볼 때는 섬의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볼 수는 있지만 보는 위치에 그 모습을 제각기 달리하고 있었다.
위 지도 18번에 위치한 프랑스계 호텔 체인점으로 전 세계 40개국에 120 체인망을 가지고 있는 고급 호텔이다. 보라보라섬 남쪽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많아 위 지도처럼 18과 19번에 많은 Resort 호텔들이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소피텔 왼편에 Huahine섬에서 반창고사건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투숙한 Maitai(소유주가 중국인같은 냄새가 나는게 모택동이 애용한 독주 Maitai를 호텔명으로 하는걸로 보아서) Lapita 호텔의 체인점인 Maitai Polynesia 호텔이 보인다.
일단 눈으로 한번 보아도 비치가 단정하게 정돈되어있는 모습이었다. 키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야자수 사이로 방갈로가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내리쬐는 햇볕에 적당하게 달구어진 하얀 백사장이 아래 위로 퍼져있어 수영복만 걸치고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그런 resort 같았다.
보통 Marina는 작은 보트나 배를 정박하는 선착장으로 port 하고는 구별된다. Port는 규모가 큰 여객선이나 화물선이 입출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는 있는 규모가 큰 marina로 보면 된다. 섬에는 저런 조그마한 마리나가 군데군데 있어 작은 보트로 이동하기가 용이하도록 되어 있었다.
식당 상호가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 같지 않나요?
영화 <남태평양>에서 섬으로 전입 온 미군 케이블 중위가 Liat라는 이쁜 현지인 처녀와 썸을 타자 그녀의 모친이 발리하이(Bali Hai)란 노래를 장차 사위 될뻔한 케이블 중위 앞에서 불러 주는데 그녀의 극 중 별칭이 바로 Bloody Mary이다. 그 이름을 따서 식당 상호로 사용하니까 <남태평양> 영화 본 관광객들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관광 안내서에 소개될 정도니 이름값을 하는 모양이다. 식당 외벽에 빼곡하게 써붙인 것이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전부 사람 이름이다. 이 식당을 다녀간 관광객의 이름을 걸어 놓은 건지 궁금해졌다.
* Bloody Mary가 여자분들이 좋아하는 칵테일 메뉴 중의 하나인데 그 이름의 유래가 여기에서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섬의 북단 마을 Faanui 근처인 것 같았다. 해안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 차를 타고 가면서 처음으로 본 현지 주민 -을 보고 차에서 내려서 카메라에 담았다. 섬마을 아이들은 물가에서 하릴없이 어설프게 물수제비를 뜨거나, 긴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해안에 널브러져 있는 돌방구들을 뜻 없이 두드리며 놀고 있었다. 이곳이 그들의 자연적인 마을 놀이터 같았다. 영어와 불어가 물과 기름처럼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놀았다. 이럴 때는 body language가 소통의 수단이 된다. 손으로 카메라를 가리키며 사진 찍는 시늉을 해 보이면 서로들 쳐다보며 계면쩍게 웃는 웃음이 되돌아온다. 이것이 찍혀도 좋다는 OK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이름도 나이도 어느 마을에 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섬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가운데 몸집이 큰 애는 여잔지 남잔지 성별을 가름하기 어려웠다.
내가 묵은 호텔에서 일하는 매니저의 딸로 엄마가 일하는 호텔에 따라와서 혼자 놀고 있었다. 모델로 계약하고 몇 커트를 찍고 나서 미화 5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크면 타히티의 미인이 될 성싶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귀여운 아이였다.
이번에는 모델료 없이 모녀를 다시 잡았다. 엄마의 얼굴에서 전형적인 폴리네시안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인류학적으로 폴리네시안의 선조가 중국 대만족과 말레이시안으로 알려져 있다.
Sofitel 호텔이 있는 근처 물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애들을 만났다. 남자애들인데 머리를 길러 곱게 땋아 뒤로 늘어뜨린 모습이 현지인은 아닌 것 같고 부모님을 따라 섬으로 들어온 관광객인 듯하였다. 아마 형제인 듯 사이좋게 물가에서 낚시질을 즐기고 있었다.
보라보라섬 선착장에서 공항이 있는 Motu Mute으로 나가는 공용 보트는 아침부터 매 1시간 간격으로 있다. 편도에 소요되는 시간이 20여분 걸리니까 배 한대로 하루 종일 줄창 오고 가는 모양이다. 렌터카 반납하는 곳이 선착장 바로 뒤에 있어 차를 갖다 주고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였다. 울며 헤어진 부산항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서럽게 남겨놓고 가는 것도 아닌데도 배를 타고 선착장을 떠날 때는 아쉬운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런 것일까? <돌아와요 보라보라항으로>
배를 타고 한참을 나와서 뒤를 돌아보니 한입 베어 먹힌 보라보라섬의 정상이 여전히 구름 속에 갇혀 버린 채로 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내가 묵었던 물가의 호텔을 배를 타고 나오면서 카메라로 잡았다. 완전한 수상 방갈로는 아니고 베란다만 물 위로 나와있어 베란다에서 바로 입수할 수 있는 구조였다. 나오는 날 아침에 수경을 착용하고 보라보라 짠물에 몸을 담갔다. 아침이어도 전혀 서늘함을 느낄 수 없이 물속에서 한 20여 분간 유유적적하게 혼놀하였다. 베란다 밑 수중까지 자라난 산호 위에 착지하였더니 산호의 강도가 무슨 금속 칼날 같아 자칫하면 맨발에 생채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처럼 석회질로 석화된 산호의 강도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어느 유명 관광지에 가더라도 헬리콥터나 작은 세스나 경비행기로 관광지를 10-20분 정도 하늘에서 유람하는 프로그램이 있기 마련이다. 보라보라섬에서도 있었지만 차로 해안도로로 돌아보느라 시간이 없었다. 대신 뱅기로 타히티 본섬으로 나갈 때 몇 점을 건져 올렸기에 그걸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Lagoon을 조선말로 석호라고 번역하는데 사진처럼 섬 주변에 형성된 반지 모양의 환초를 경계로 안쪽의 파도 없는 조용한 바다를 지칭하는 말이다. 파도가 없이 산호가 성장하기에 때깔이 고운 쪽빛 남색을 띠며 스노클링 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타히티의 보라보라섬이라고 하면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던 때가 있었다. 신혼 여행자로서가 아니고 배낭여행자로서 말이다. 주위 경관이 소문대로 아름답기는 한데 사람의 변덕스러운 마음처럼 한 곳에 진뜩하게 눌러앉아 있기는 힘든 곳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그놈의 일상을 살아가는 원주민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한다. 슬쩍 차로 지나치면서 맡아본 원주민들의 삶도 너무 고아버려 퍽퍽해진 닭고기 앞가슴살처럼 별 맛도 없는 것 같았다. 인생의 맛이 그렇게 단물 빠진 퍽퍽한 닭고기의 그것이라고 읊조렸던 퇴폐적인 시인은 이렇게 한 구절 적어 놓았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타히티로 돌아가는 뱅기가 이륙하여 오른쪽으로 보라보라섬 일부가 보이고 왼편으로 진주 목걸이를 쪽빛 남색의 Lagoon에 주렁주렁 걸어 놓은 듯한 섬들이 환상적으로 눈을 유혹하였지만 그것도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고 위의 시 한 구절처럼 통속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보라보라에게 품었던, 그리고 잠시동안 주었던 연정을 깡그리 말아 가지고 허리춤에 차고 돌아올 수 있었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