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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Nov 28. 2020

지노 배낭여행기 - 사진이바구

로버트 카파와 카파이즘(Capaism)

2020년 11월 26일(목) 추수감사절


Photojournalism으로 불리는 보도사진분야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바로 로버트 카파(Robert Capa:1913-

1954)로 사진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오늘 사진 이야기는 그의 짧은 생애에 관한 이바구다.



- 유태인으로 태어나다

카파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소설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당시 새로운 이념으로 젊은이를 사로잡은 공산주의를 수용하면서 유태인 탄압에 항거하다 20세전에 독일로 추방당했다. 독일에서 거주하는 동안 비로소 사진이란 매체에 눈을 뜨고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제일 걸림돌이 유태인 냄새가 펄펄나는 이름이었기에 과감하게 창씨개명하여 미국인같은 Robert Capa로 태어났다. 이름이 좋은지 창씨개명하고 나서부터 인생이 술술 잘 풀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오다 이름바꾸고 로버트 카파로 활동하니 사진도 잘 팔리고 같이 사진 활동하던 파트너로 이뿌장하게 생긴 여친 겔다 타로(Gerda Taro)도 만나고해서 숨통이 확 트였다. 자료에 의하면 로버트 카파를 "이름있는 미국 사진작가"로 띄워주며 여친 겔다 타로가 사진중개상 노릇을 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작가 명성을 띄워주면서 높은 값에 사진팔아먹는 사기꾼 비스무리한 커플이었을지도 모른다.




 - 스페인 내전을 취재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왕정정치가 오래 지속되다 1930년대초에 공화정으로 넘어왔지만 종전의 기득세력권인 교회, 귀족, 군부에 의해서 여전히 통치되고 민초들이 억압을 받자 1936년 총선에서 양심적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노동자를 대변하는 인민전선이 결국 승리하여 체제 변화를 예고하였지만 항상 이런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정권을 잡으려는 야욕을 가진 그룹이 있기 마련인데 군부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프랑코(Franco) 장군이 그런 인물로 당시 모로코(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다)에 주둔하고 있던 외인부대를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프랑코장군 생각에는 무력으로 누르면 금방 무너질거라고 예상했던 인민전선이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대항하여 내전이 근 3년이나 질질 끌었다. 이렇게 내전이 장기화되었던 이유는 국제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인민전선을 지원하자 이에 동조하는 전세계의 지원군이 스페인으로 달려가서 인민전선에 가담하였는데 이를 국제여단이라고 칭한다. 주요 인물을 열거해 보면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그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를 발표한 헤밍웨이, 게르니카 학살을 붓으로 고발하여 "게르니카"를 그린 피카소, "동물농장" 1984년"의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 "인간조건"을 쓰고 후에 프랑스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작가 앙드레 말로는 붓을 던지고 스페인으로 달려가서 총을 잡았다. 그리고 스페인 첼리스트 거장 파블로 카잘스는 파시스트에 항거하다 국외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내전은 3년간 지속되다가 결국 정부군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그후 프랑크가 죽은 1975년까지 프랑코가 일인 독재정치를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 한 장의 사진으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카파는 양심적 지성인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게 아니고 잡지사 <라이프>의뢰로 인민전선 편에 서서 취재하였다. 1936년 스페인 코르도바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인민전선 병사가 언덕을 오르다가 정부군의 총탄에 맞아 총을 허공에 놓으면서 쓰러지는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카파가 이를 잡지사에 송고하여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병사의 죽음"(Falling Soldier)이란 제하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카파가 스타로 뜨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Falling Soldier) 1936 by Robert Capa




- 사진의 진위성에 대한 논쟁

지금까지도 이 사진의 진위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카메라를 수동으로 조작하던 그 시절에 이렇게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을 촬영한 건지를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나의 의견은 예전에 짜고친 고스톱처럼 카파와 타로가 사진장사한 전력을 비추어 볼 때 조작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내전에 여친 타로도 같이 따라 갔기 때문이다.




   -카파가 취재한 전쟁들

1.스페인 내전으로 1936년 '병사의죽음'으로 카파는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여친 겔다 타로는 취재중 전차에 깔려 유명을 달리했다.
2.중일전쟁중 1938년 중국 우한으로 날아가서 일본군의 침략에 관련한 취재를 잠시 했었다.
3.이차세계대전중에는 유럽전선에서 주로 취재하다가 그의 두번째 대박 사진을 찍게된다. 1945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카파는 Omaha beach로 상륙하는 연합국 병사의 사진을 찍었는데 초점이 안맞아 사진이 떨리게 나왔다. 이를 두고도 또 말이 많았다. 카파 손이 떨린건지 아님 일부러 떨리게 찍은건지 본인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4.1947년에는 팔레스타인전쟁을 취재하여 그 사진을 미국인 극작가 Irwin Shaw가 지은 Report on Israel에 게재하였다.
5.1954년 인도차이나전쟁은 그가 마지막으로  취재한 전쟁터로 이곳에서 취재중 지뢰를 밟아 지구를 떠났다.

그외 1947년에는 미국 노벨상 작가인 존 스타인백(인간과 생쥐,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과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존의 책 A Russian Journal에 게재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5년, Omaha Beach 프랑스)




  - 최초로 프리랜서 사진가 협회 창설

1947년 파리에서 앙리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데이비드 세이무어(David Seymour), 조지 라저(George Rodger) 같은 거장들과 함께 Magnum Photos라는 협회를 만들어 일종의 사진뱅크로 특정매체가 사진을 주문하는게 아니고, 사진뱅크에서 골라 가도록하여 협회 사진사들은 자기가 찍고 싶은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 카파이즘(Capaism)의 효시

1954년 5월 25일 오후 2시 55분 카파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병력과 함께 이동중이었는데 지프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사진을 찍기위해 먼저 앞으로 걸어다가 매설된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마흔한살이었다. 그를 기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취재기자의 정신"을 카파이즘(Capaism)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도 카파는 곧잘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당신이 찍은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jh-


로버트 카파(1947년, 프랑스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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