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클라라 - 영원한 혁명가 잠들다
2011년 8월 7일(일) 맑음
아바나 주변은 대충 습득한 것 같아 오늘부터는 렌터카로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가이드 차를 가지고 그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짓이다. 돈이 들더라도 구경 한번 잘하려면 자동차가 제일 중요하다.
차를 렌트하러 갔더니 다 나가고 달랑 2대 남아 있는데 현대 액센트급이다. 시간 없는데 그거라도 빌려 가지고 가는데 가이드가 저그 집이 가는 길에 있다고 STOP BY 하잔다. 좋지. 본토인 집도 한번 구경하고 사진도 박고.
뭐 만한 소형 렌터카. 하루 사용료 80불에 보증금 150불을 걸어야 한다. 물가에 비해 꽤 높은 차량 렌트비다.
가이드 집을 방문하고
가이드 집은 안팎으로 보아도 다른 아바나 서민들 집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쿠바 국민들이 집을 어떻게 장만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고 집 지을 터와 건축 재료를 준비해서 짓는다고 한다. 우리들처럼 집을 전문으로 매매하는 부동산업은 쿠바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집에 가 보니 어무이 동무는 일하러 가고, 휴가 중인 아바이 동무와 일 안 하고 집에서 개기고 있는 쌍디 동생이 있었고 게다가 멀리 집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간다고(가이드는 돈 벌러 가니 출장인 셈이다) 가이드 자밀의 여자 친구도 와 있어 인사하고 커플 사진을 거나하게 박아 주었다.
가이드가 배가 좀 나왔지만 멋쟁이다. 옷도 악어 표 라코스테로 걸치고, 거기에 색상 맞추어 모자까지 악어 표를 쓴다.
시계에 목걸이, 반지, 셀폰 등 없는 게 없다. 나도 없는 IPOD까지 가지고 있으니. 지 여자 친구(이름은 뭐라 하던데 졸라 어려워 기억 불가능)는 방년 21세로 회사 다니는데 가이드 말로는 공주병이 조금 있단다. 내가 위로해 주었다. 이 세상에 공주병 없는 여자는 없다고. 그리고 여자는 공주병이 있어야 그 본연의 생명이 살아난다고. 말이 될 것 같으면서도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어디까지 가 볼까나?
출발하기 전에 대략적인 map을 눈으로 그려 보았다.
아바나를 출발해서 제 1번 목적지인 산타 클라라에 가서
체 게바라 사령관의 추모 묘지와 그의 박물관과 추모관을 참배하고, 제 2번인 Trinidad로 가서 세계 문화 유산을 찾아보고, 제 3번 도시 까마구웨이(Camaguey)를 거쳐 쿠바 애국가가 탄생한 제 4번 도시 바야모(Bayamo)로 들어갈 계획이다. 바야모로 길을 잡은 이유는 바야모에서 울창한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을 넘어 가면 예전에 혁명군들이 멕시코에서 Granma 배를 타고 상륙한 지점 Niquero와 근처에 있는 자연유산지로 지정된 국립공원이 있어 시간이 허락하면 가 볼 참이다. 제 5번 도시인 산티아고드쿠바가 마지막 종착지가 되었지만, 원래 야무진 꿈은 제 6번 도시 미국 해군기지가 있는 꽌타나모(Guantanamo)를 거쳐 쿠바 최초의 식민지 마을인 바라코아(Baracoa)까지 가려고 했는데 그게 제 7번이다. 결국 6,7번 도시는 이번에 가볼 수가 없어 천상 다음 기회로 미루어 놓았다.
산타 클라라로 출발
운전대는 가이드가 잡아 편하게 고속도로를 달렸다. 지방으로 내려 갈수록 교통량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마주치는 차량들이 거의 없었다. 고속도로 길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서있는게 자주 눈에 띄였는데 버스와 같은 공공 교통 수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방향이면 히치 하이킹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여기서는 히치 하이킹이 생활화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다. 체 게바라가 잠들고 있는 산타클라라로 가는 도중에 점심하러 쉬어간 레스토랑. 먹어보니 맛은 졸라 없던데 가격은 다 받아 묵는다.
방문객들의 눈을 끌게 한쪽에 여러 동물 모양상을 배치한 것이 사회주의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시효과 같기도 해서 바로 썩 끌리지는 않았다. 선입견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런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없는 것들이라도 자본주의 사회처럼 풍족이 미덕인 것처럼 꾸미거나 미화시키는 경우를 보아왔기에 그런 것 같다. 아직 가보지 못한 북조선의 실상을 너무 상상한 탓일까.
지방 시골길로 내려 가니 말을 타고 이동하는 광경이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여 미국 서부 개척시절의 카우보이를 마주 보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길 가로 걸어가는 인민들이었고, 혹은 자전거나 말이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숲이 우거진 시골 산길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주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마을 한복판을 달리는 우리의 마을버스같은 말 한 필이 끄는 달구지 버스를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체 게바라 추모 묘지
아바나에서 출발한 지 3시간 30분 만에 쿠바 중부 도시 산타 클라라(SANTA CLARA)에도착했다. 이 나라에 오는 관광객 중에는 여기만 다녀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만큼 체 게바라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총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체 사령관을 중앙에 놓고 오른편에는 반군 게릴라의 활약상을 반 부조 형식으로 형상화해놓고, 왼편 돌단에는 체 게바라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들의 이름을 새겨 놓아 그들을 기리고 있었다.
주로 고난의 행군하는 게릴라 모습을 새겨 놓았다. 말을 탄 체 게바라 사령관의 모습도 있고
추모 묘지는 동상 앞 쪽으로도 넓은 광장을 만들어 놓아 행사 시 필요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
체 사령관은 일단 첨 보는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준다. 할리우드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훈남이다. 검은 베레모에 별 하나 달고 굵은 시가를 물고 미소를 쪼개는 얼굴에는 양쪽 귀 밑으로 자리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에 헝클어진 뒷머리카락으로 꾸미지 않은 야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난 것도 그를 흠모하는 이들의 가슴을 부여잡는 이유도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체 게바라를 24세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뜨난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에 비교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지 두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카리스마적인 인상을 각인하여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는지 그 결과에만 놓고 볼 때 비교되는 관점일 뿐이다. 잊혀진 사람에 대한 향수가 이토록 강렬하게 되살아나 온 적이 그렇게 흔치 않기 때문에 체 게바라에 대한 환호가 제임스 딘에 대한 그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쨋든 잊혀진 사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쿠바 게릴라 반군을 바부도스(BARBUDOS)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부도스는 스페인어로 <턱수염이 있는 남자>라는 말로 산속에서 활동하는 게릴라의 생활상을 그대로 대변하는 별칭이다. 당시의 반군 대부분이 농민에서 훈련을 통해 게릴라로 변신하기 때문에 수염을 기르는 것이 생활하기에도 편리했을 수도 있다.
체 게바라에 대한 책자가 우후죽순식으로 한 때 서점가를 유행하기도 했다. 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들어보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에 대한 책이나 평전을 읽어보고 나서는 지울 수 없는 그의 매력에 푹 빠진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내가 체에 대하여 느낀 것이 몇 가지가 있다.
- 무력 투쟁의 용맹스러운 군인이 되었지만 출신 배경은 중산층 가정의 의사 출신이라는 것(그러고 보니 피델은 변호사 출신이니까 예나 지금이나 의사, 변호사가 금값이라는 말이다)
- 중산층 출신이면서도 압박받는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가진 심장이 따뜻한 사나이
- 혁명 후 권력 투쟁에 뛰어들지 않고 자기희생으로 사회 개혁 추진에 매진한 점
- 지도자 위치에서도 검소한 생활 정신으로 부하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당나라 말기에 환관들의 횡포와 농민에 대한 수탈로 황소가 주동이 되어 봉기된 농민 반란이 <황소의 난>인데 비록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당이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쿠바 반군 게릴라도 농민의 난이나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그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황소같이 힘만 있고 지략이 없는 경우는 정책 노선 부족으로 나아갈 수없다. 그러니, 교육을 통한 머리가 깨어 있는 지도자는 미래를 제시하는 비전이 있기 때문에 체의 출신 배경부터가 그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
알젠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과 대학시절에 선배와 같이 오토바이 여행을 하게 되어 중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경험하게 되는 핍박받는 민중에 대한 이해가 그를 게릴라로 변신하게 된 동기라 보면 어려운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 쓰임새만 보아도 그의 인물됨을 짐작하는 대목이다. 혁명을 같이한 동지간에도 혁명 과업 완수 후에는 통상적으로 살벌한 권력 투쟁이 있기 마련이지만 피델에 이어 혁명군 서열 2위라는 파워가 무색하게 체는 쿠바 국립 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권력과 별 관계없는 보직으로 전전하다가 콩고 내전에 참가하였다가 그 후 볼리리아 내전에 반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이런 자기희생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쿠바 혁명 정부 내에서도 그는 탄탄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가 볼리비아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 다른 평전에서는 피델이 서열 2위 자리인 국방부 장관직을 동생 라울에게 넘기자 스스로 권력 투쟁을 포기하는 탈출구로 쿠바를 떠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쨌든 권력에 대한 포기가 자기희생적인 선택이라는 결과로 되었으니 권력을 맛본 자들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런 살신성인의 길을 체는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쿠바를 떠나면서 마지막 그가 남긴 말"아스타라 삑토리아 시엠쁠레(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는 지금도 쿠바 방방곡곡에 그의 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게릴라 투쟁 시절부터 혁명 과업이 완수되어 쿠바 2인자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체는 줄곳 청렴결백한 생활을 유지했다고 하는데 개인에게 배급되는 모든 물자도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받았고 항상 한정된 물자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 반하여 체는 혁명 성공 후 혁명 대열에 참가하지 않았던 농민이나 독재정권 시절에 그들에게 빌어붙은 자들을 색출하여 쿠바에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그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한 것은 부정적인 면으로 평가받는다.
산타 클라라 시내 중심지에 있는 기념탑 및 그의 묘지
동상 뒤로 돌아 들어가면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에 몸을 바친 순국 용사의 묘지를 따로 조성해 놓았다.
체 게바라 추모 공원에 안장된 순군한 혁명 용사의 묘
기념품 판매점 내부
저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가면 맨 아래층에 체 박물관과 추모관이 좌우로 나뉘어 있다. 여기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일절 금지되어있어 카메라 보관소가 따로 있다. 카메라를 맡기면 번호표를 준다. 박물관 안에는 체 유년 시절부터 혁명 시절까지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일대기가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영어로 번역된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그 외 체의 개인 소지품 - 그가 지녔던 권총, 군복, 시계, 담배 파이프, 베레모, 카메라, 전화기 등등 그가 사용했던 모든 품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가면 옆에 있는 추모관으로 안내해 준다.
추모관은 동굴 형상으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게릴라 활동 시 주로 지냈던 동굴을 뜻하는 것 같다. 체 유해를 동굴 밑에다 안치하고 그 위에는 영원히 타 오르는 횃불을 설치하여 그 불꽃이 1년 365일 내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마치 그의 혁명 정신은 몸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 정신만은 영원히 진행형인 것처럼 활활 타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사형되어 암매장된 그의 유해를 근 30년 뒤에 발굴하여 그의 고향 아르젠티나로 가져가지 않고 쿠바로 가져온 것은 그가 쿠바 혁명에 기여한 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추모관을 아바나 등 쿠바의 다른 곳으로 하지 않고 여기 산타 클라라로 정한 것은 체가 이끈 게릴라 부대가 여기 산타클라라에서 정부군을 대파하여 아바나 입성의 입지를 만들어 혁명 성공의 틀을 만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은 붐비지 않고 단체 관광버스 1대만 달랑 파킹 되어 있는 것이 혁명 영웅의 참배지치고는 왠지 쓸쓸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떠나야 하는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이제 다음 경유지 트리니다드(TRINIDAD)를 향해 부지런히 길을 떠나야 한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