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다드로 가는 산길
2011년 8월 7일(일) 맑음
트리니다드는 산타 클라라에서 남쪽으로 100 킬로 남짓하지만 길은 내려 갈수록 평지가 아니고 산길이다. 체구가 조그마한 우리 현다이 조랑말이 힘겹게 산길을 오르 내린다. 처음보는 쿠바의 산길이다. 신기하게도 야자수 나무가 길가에 가로수만으로 서있는게 아니고 산속에도 키 큰 야자수 나무가 삐곡하게 들어 서 있다. 마치 어린 학생들을 옆으로 앞으로 빠뜻하게 줄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성장이 빠른 키 꺽다리 몇 명이 툭 튀어 나온것 같다.
열대우림지역이라 그런지 산속에도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모든 것들이 푸른 녹색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길은 호젓하고 산새들끼리 희롱하는 듯 서로 주고받는 고놈들 새소리만이 이 산중의 고요함을 부서 버린다.
길가에는 키가 늘씬한 이런 야자수들이 자태를 뽐내고 산길에는 차도 뜸하고, 한여름 오후의 햇살이 나무 사이로 갈라져 나오는 것을 보고있노라면 조용하고 평화롭다는 느낌에 마음까지 고요해진다. 이때에는 아바나에서 사 둔 쿠바 시가에 불을 댕겨 한모금씩 빨아 창밖으로 날려 보내면 진짜 쿠바 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잠시나마 저 속세의 짐을 내려 놓는다. 전화도 안 가지고 왔으니 저 사바세계에서 나를 찾을 이도 없고 나 또한 이 무릉도원에서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지금은 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날숨과 들숨만 잘 쉬면 된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와 이런 산속에 들어 와서야 이런 감흥이 살아 나는걸 보니 난 도시형이 아니고 시골형인가봐. 미제국주의 땅으로 돌아가면 어디 농사 지을 땅이나 봐 둬야 할것 같다.
웬 삽겹살이?
갑자기 차길 옆으로 무엇이 지나 가길레 봤드니 돼지새끼다. 차를 세우고 한장 찍었는데 몸집이 강아지보다 조금 크다. 처음에는 야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산속에 거주하는 쿠바 농민들은 이런 돼지, 염소, 개들을 전부 놓아 먹이고 있었다. 이녀석을 보고 있자니 약간 도톰한 삼겹살 한 점을 잘 구어 상추에다 흰밥을 얹고 그위에 마늘과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뭐만하게 싸서 불거진 입으로 요리조리 씹어 먹는 그 맛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여기에도 그런 메뉴가 있을까.
거의 산 정상에 올라 왔는지 휴게소가 있어 차를 세우고 그늘막에 앉아 아랫 동네를 내려보니 저 멀리 강인지 호수인지 물길이 보인다. 산타 클라라에서 트리니다드로 가는 길은 이렇게 산을 몇 개 구비구비 넘어야 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 가는 길에 집 몇 채가 길가에 모여 있었다. 주민들이 자가 재배한 열대 과일들을 집 앞에서 팔고 있어 차를 세우고 가서 처음보는 과일 구아바(GUAVA)와 한 입에 들어갈 만한 꼬마 바나나(영어로는 PLANTAINS라고 하는데 여기 미국에서도 판다) 몇 개를 샀다. 구아바는 껍질은 브라운 색인데 까면 속살이 홍시감 색깔로 맛은 달다. 속에 들어 있는 씨가 아보가도 씨만 하게 큰 것도 있다.
집 밖에는 예쁘게 만들어 놓은 밀집 모자를 파려고 벽에 전시해 놓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주로 관광객에게 판매된다고 한다. 하기사 여기 사는 본토박이들이 살 이유가 없겠지. 거의 대부분이 자급자족 체제이니까.
드디어 산을 넘어 와 전망대에서 보니 저 멀리TRINIDAD시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마침 해가 저물어 수평선 저쪽으로 막 떨어질 즈음이라 붉은 노을이 하늘을 온통 물들었다. 지금까지 참 멋진 곳에서 많은 아름다운 낙조를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이야 여기나 저기나 매양이고 단지 내가 서 있는 길만 틀릴 뿐이다. 그러니 몸이야 어디에 가 있던간에 마음만 잘 다스리면 보는 눈이 틔여 바르게 보고 깊게 생각하고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다. 모두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보자.
하늘은 조금씩 그 빛을 잃어 서서히 어둠에 젖어가고 높은 산마루 길의 전망대에서 그 붉디 붉은 노을을 혼자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시가 생각이 나네. 다 외우지 못해서 찾아서 베껴 쓴다. 칸닝구하고 있다. 시란 머리 속으로 달달 외워서 수시로 꺼내서 읽어 보는 것이 제 맛일텐데…
외인촌(外人村)
하이얀 모색(暮色)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