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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 배낭여행기 - 미국 국립공원 유람기 5

Gateway Arch NP(게이트웨이 아치 국립공원)

by 지노킴

2020년 7월 21일(화) 맑음


어느 국립공원으로 먼저 갈 것인가?


매머드 동굴 국공에서 게이트웨이 아치 국공까지

코로나 시국으로 지하동굴의 가이드 투어가 딱 한 군데만 오픈되어 있어 그것만 구경하고 나니 다른 거 둘러볼 곳이 없었다. 점심을 야외 피크닉 테이블에서 거나하게 차려 먹고 다음 방문할 국립공원을 물색해 보았더니 후보지가 2군데로 압축되었다. 완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아칸소 주 핫스프링 국공과 북서쪽으로 핫스프링 보다는 약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게이트웨이 아치 국공이 그것들이다.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처럼 <서부로 서부로> 구호에 맞추자면 핫스프링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게 맞겠지만, 나중에 서부에서 동부로 돌아올 적 루트를 생각해 보니 핫스프링이 중복되는 것 같았고, 이다음으로 가볼 국립공원은 콜로라도에 있는 록키 마운틴 국립공원임을 감안하면 핫스프링이 이니고 게이트웨이 아치가 맞는 것 같아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점심을 피크닉 테이블에서 거나하게 먹고 오후 늦게 게이트웨이 아치 국립공원으로 길을 떠났다.


거나하게 차린 점심 식탁



게이트웨이를 먼발치에서


세인트루이스의 심볼 Gateway Arch

게이트웨이 아치 국공은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출발 지점인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시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미국의 국립공원이다. 이 공원은 게이트웨이 아치라는 이름의 쇠사슬 모양의 강철 아치가 있으며 세인트루이스의 상징물이다. 이외에 구 법원 청사와 게이트웨이 아치 박물관 등이 위치하며, 미국 국립역사기념물 및 미국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전에는 국립공원이 아니었고 1935년부터 2018년까지 제퍼슨 국립확장 기념관(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이었는데 게이트웨이 아치 국립공원 (Gateway Arch National Park)이란 명칭으로 2018년 2월 22일, 미국의 60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공원 이름에 Gateway를 넣은 이유가 여기가 서부로 가는 관문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미국 국립공원도 이름도 없는 무명 씨에서 어느 날 갑자기 국립공원으로 등장하는 게 아니고 미합중국 내무부 산하 기관으로 있는 국립공원관리청에서 미국 내의 모든 국립공원, 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 자연보호구역, 국립 기념관, 국립기념물(National Monument;준 국립공원) 등을 총 망라해 국립공원 시스템으로 관리한다. 오랜 기간 동안 사적지나 국립기념물, 자연보호구역으로 있다가 심사를 거쳐 의회 의결로 국립공원으로 승격한다. 그래서 국립공원의 수가 일정한 게 아니고 생물처럼 성장하여 그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현재 2025년 기준으로 국립공원 수는 63개이다.



미시시피강에 반사된 개이트웨이 아치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는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미시시피강변에 있는 192m 높이의 기념 아치이다. 게이트웨이 아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치이자,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인공 기념 건축물이다. 스테인리스강 철로 제작된 이 건축물은 미국의 미시시피 강 너머 서부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1965년 준공되었다. 게이트웨이아치는 게이트웨이아치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미국 국립역사기념물 및 미국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 아치 건립의 이유를 좀 더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 자축

- 개척자들의 서부 영토 확장 운동 고취

- 미시시피강 서쪽의 최초의 시민 정부 기념

- 드레스 스콧 판결로 촉발된 노예제에 대한 토론


다른 것들은 그냥 수긍이 가는 이유들인데 드레스 스콧 판결은 알 수가 없어 좀 더 깊게 파 보았다.

드레드 스콧은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미국 육군 군의관 존 에머슨(John Emerson) 소유의 노예였다. 군인인 에머슨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새로운 부임지로 옮겨갈 때마다 스콧을 데리고 다녔다. 1846년에 에머슨이 죽자 스콧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와서 도와주겠다는 노예제 폐지론자인 변호사들의 부추김을 받아서 에머슨의 미망인에게 소송을 제기하여 자유를 요구했다. 그는 자신은 노예 제도가 불법인 여러 타주에서 생활한 경험도 있기 때문에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믿어 미주리 주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미주리 주법원이 스콧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자, 그의 변호사들은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잘못된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노예로 미합중국에 들어온 흑인과 그 후손은 그가 노예이든 노예가 아니든 미국 헌법 아래 보호되지 않으며, 미국 시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연방 법원에 제소할 권리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연방 정부가 미국 영토 내의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하고, 정당한 법의 절차 없이 주인으로부터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노예제를 대놓고 옹호하는 듯한 1857년 이 판결은 남북 전쟁의 간접적인 기폭제가 되었고, 전쟁 후 미국 헌법이 수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GA NP 옆에 세운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동상

루이스 클라크 탐험(Lewis and Clark Expedition)은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명령으로 1804년부터 1806년 사이에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대령과 그의 동료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소위가 진행했던 탐험으로 루이지애나 매입 직후 이뤄졌으며 세인트루이스에서 미국을 가로질러 태평양에 이르는 경로에 따라 진행됐다. 이 탐험의 주요한 목적은 새로이 얻은 영토를 조사하고 미주리 강 북서쪽을 따라 그 땅이 컬럼비아 강에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근접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탐험하는 동안 루이스와 클라크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확실한 수로를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럼으로써 다른 나라들에게 그 땅이 미국의 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 탐험의 두 번째 목적은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것으로서 그 지방의 동식물 생태계, 지리, 그리고 천연자원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탐험대는 이 탐험에서 그 지역의 수많은 원주민들과 거래함으로써 얻은 정보들로 많은 강과 호수를 발견하였고 그 과정 동안 그린 그림들, 여행기록과 지도를 1806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수지맞은 루이지애나 매입


1803년 구입한 루이지애나 영토 전도

1803년에 미국이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영국과의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의 제안으로 매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미국은 영토의 크기가 졸지에 두배로 늘어났으며, 서부로의 진출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루이지애나가 현재 미국의 남부에 있는 조그마한 루이지애나 주가 아니고 미 중서부를 커버하는 광대한 영토임을 위 지도를 보면 확연해진다.

루이지애나 매입 전의 미국 영토는 1783년 미국의 독립을 확인한 파리 조약에 따라 획득한 동부 13주에 불과했었다.

1803년에 미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 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은 소련으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인 경우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구매 중 하나다. 스페인이 소유했던 루이지애나 영토가 프랑스로 넘어간 경위를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루이지애나의 소유권이 1763년에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북미에 프랑스가 진출하게 되면 영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 남미에 있는 스페인의 식민지 보호와 통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며 스페인을 설득해서 1800년 10월에는 스페인과 비밀리에 조약을 체결하여 루이지애나를 다시 양도받았다. 농산물 수송에 있어서 미시시피 강의 운항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미국은 1795년 스페인과 맺은 조약을 통해 운항권과 뉴올리언스의 기항권을 이미 확보했으나 또 한 번 주인이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바뀌는 바람에 입장이 난처해지자 뉴올리언스 매입과 미시시피 강의 운항권 확보를 위해 이번에는 프랑스와 협의해야만 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미국 협상단에게 뉴올리언스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에 대한 매입을 제안하였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놀란 미국 협상단은 매입가부에 대한 법적인 결정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803년 4월에 매매 계약을 성사시킴으로 당시 미국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배로 넓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결성도 루이지애나 매입 다음 해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결국 불모지와 다름없는 광대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리 조사하여 영토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던 미국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도심지 한복판에 있는 국립공원


도심과 게이트웨이 아치

고가도로 위로 차들이 쌩쌩 달리고 아치 키 높이만큼 우뚝 솟은 도심의 건물들 사이에서 아치가 마치 높이를 자랑하듯 모양을 내고 있다. 국립공원이 저런 도심지 한복판에 있다니 얼른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미시시피 강변의 국립공원

국립공원이라 하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산계곡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청정수에 우거진 숲, 깊은 산속으로 이어진 트레일등이 연상되는 색깔로 치면 녹색이다. 그런데 여기 도심지 한복판에 떡하니 서있는 게이트웨이 국공은 색깔로 치면 딱딱한 콘크리트 회색이다.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켄터키에서 미주리로

켄터키 매머드 동굴 국공에서 점심을 하고 미주리 주로 쉬지 않고 줄곧 올라왔는데도 거의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세인트루이스로 들어왔다. 도심지 국립공원이 오후 5시가 넘으면 Close 할 것 같아 길을 찾다가 잘못하여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다리로 진입하고 말았다. 다리 중간에서 유턴할만한 장소가 없어 결국 긴 그 다리를 끝까지 건너고 말았다. 다시 이쪽으로 다리를 건너오면서 생각해 보니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공원 Visitor Center를 가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오늘 저녁을 근방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도심지 국공에 캠핑장이 어디 있을 리 만무하고 고속도로 휴게소 찾기도 힘들 것 같아 그냥 이대로 콜로라도 덴버로 질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회색빛을 멀리하고 녹색을 찾아 대도시를 미련도 없이 훌훌 떠나버렸다. - J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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