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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호 Sep 23. 2016

느리게 걷자, 느리게 생각하자

네팔 공정여행 답사기 - 2

2016년 9월 18일 일요일트래킹 둘째 날

울레리(Ulleri, 2070m) - 고레파니(Ghorepani, 2850m)     


05:30

일찍 눈이 떠졌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젯밤 일찍 잠들었던 탓이다.     

멈춰야 하는 순간이 닥쳤다. 처음엔 사진을 찍으려던 것뿐이다. 누웠다. 일부러 고른 것도 아닌 바위가, 맞춘 듯 내 몸을 받아주었다. 배낭도 푹신했다. 스틱을 내려놨다. 마음이 떨렸다. 이 순간, 이 순간을 위해 이 여행이 있었다고 말해도 좋다. (중략) 가라 가라 가라. 꼭 가서 열 번 후회하고 한 번 어떤 순간을 만나라.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깊은 후회와 놀라운 경탄을 두루 겪을 수 있다면 여행은 가치 있다. 그 순간은 꼭 온다. 나는 오늘로 두 번째 그 순간을 겪는다.

                                                                        - ‘멀고 낯설고 긴, 여행이 필요해‘ 중에서 / 서형원 지음 

나에게도 그 순간이 왔다. 


바로 앞에는 눈부시게 떠오르는 태양

왼쪽에는 안나푸르나의 새하얀 설산

오른쪽에는 산, 구름, 그리고 마을의 어울림

 

나는 오늘 첫 번째 그 순간을 겪었다.

내가 묵었던 방의 창 밖 풍경(정면), 해가 떠오르고 있다.
내가 묵었던 방의 창 밖 풍경(왼쪽), 설산이 보인다.
내가 묵었던 방의 창 밖 풍경(오른쪽), 구름에 가려진 마을.

07:00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네팔 사람들을 보통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아침에 계란프라이와 빵을 가볍게 먹고(이건 간식이다), ‘달밧‘으로 점심,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간식이라고 하기엔 나에게 너무 많은 양이다.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는 네팔 사람들. 책상에 색을 칠하고 있었는데 페인트가 아니라 꽃으로 즙을 낸 그것으로 색을 내고 있다. 아, 얼마나 자연친화적인가.

07:30

자, 출발이다.

다리, 어깨, 허리 모두 통증이 없다. 그런데 잠을 잘못 잤나보다. 목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흠....... 어찌 되었든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오늘은 가방을 바꾸지 않고 내 짐을 조금 나눠주기로 했다.

노트북과 책 한 권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08:00

얼마 걷지 않았는데 부펜드라(Bhupendra)씨가 잠깐 쉬자고 한다.

나를 앉혀 놓고 로지 주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다음 주에 한국에서 청소년 33명이 온다고 해서 

한 번에 수용 가능한 로지를 찾고 계셨다. 일을 하면서 또 일을 하시는 모습....... 덕분에 잘 쉽니다.     



로지(Lodge)

안나푸느라를 오르다보면 로지를 많이 만날 수 있다. 트래커들이 쉬어가는 곳이자 마을 분들의 삶터이다.

보통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운영하는 곳이고, 마을에 살지 않는 사람은 로지(Lodge)를 지을 수 없다.

.

여행객들이 쓰는 물은 계곡에서 끌어온 것이고 먹는 음식은 가공품이 아닌 이상 마을에서 직접 재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전기도 계곡을 이용하여 생산한다. 꽤나 자급자족이 가능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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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들이 쓰는 체류비는 마을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안나푸르나에는 끊임없이 여행객들이 올테니 이 마을들은 지속가능해 보인다. 만약 네팔에 지진이 또 일어나서 여행객이 끊기면 이 마을들은 어떻게 될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급자족하며 삶을 게속 이어갈 수 있을까 궁금하다.

.

아, 지진이 나면 일단 생사가 문제구나. 

.     

세금을 내냐고 물어보니 정직하게 다 내는 곳은 없다고 하셨다. 여행객들이 소비하는 돈은 정부에 세금을 내고,

가이드, 포터들이 소비하는 돈은 트래킹 위원회에 일정부분 낸다고 한다. 트래킹 위원회는 걷은 돈으로 길을 정비하는 등 트래킹 코스를 관리한다.


08:15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출발이다.

비가 언제 왔냐는 듯이 오늘은 하늘이 참 맑다.어젯밤 비가 많이 내렸다.
이 곳 전기의 근원.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충분한 전기가 생산되지 않아 종종 로지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무덤인줄 알았는데 사원이다. 세모 안에 원래는 신 조각상을 넣어둔다고 한다.
오늘 걷는 길은 대부분 울창한 숲이었다.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보통 지금 자신의 상황을 비추어 보고 대답한다. 즉, 현재에 시점을 맞춰 행복한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현재를 규정하는 시간은 또 다르다. 누군가는 오늘 하루를 말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일주일 혹은 한 달, 아니면 1~2년을 말할 수도 있다.     


문득 ‘마시멜로 이야기‘ 책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 앞에 마시멜로를 두고 이야기한다. “지금 이걸 먹으면 그냥 하나만 먹을 수 있고, 지금 참고 내일 먹으면 하나 더 받아서 두 개를 먹을 수 있어.” 그리곤 아이를 혼자 둔다. 마시멜로를 바로 먹는 아이도 있고, 참는 아이도 있다.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지금 당장의 욕구를 참고 마시멜로를 두 개 얻는 아이가 성공(사회적 통념의 성공을 말한다)할 확률이 높다고. 나에게는, 지금 당장의 행복을 참으면 나중에 더 큰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고 들린다. 정말 그럴까?


물론 지금의 행복만을 추구하다가는 훗날 불행이 올수도 있지만 지금의 행복을 참는다고 나중에 더 큰 행복이 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너무 참지 말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해보자.

가끔은 현재를 ‘지금 이 순간’이라고 규정하고 나는 행복한가를 판단해보자.


그런 의미에서 ‘부펜드라(Bhupendra)씨,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요.......’

쉬었다 갑시다!

09:30

원래 점심을 먹으려고 한 곳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오늘 목적지인 고레파니(Ghorepani)까지 오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원래 점심을 먹으려던 곳.

10:30

힘들다, 어제보다.

다리와 어깨에 통증이 더 빨리 찾아오고, 숨이 더 빨리 차오른다.     


그럴 땐, 쉬어가면 그만이다.

누가 대신 걸어주는 길이 아니다.

결국 내가 걷는 길이다. 

나만의 속도로 뚜벅뚜벅, 방향만 잃지 않으면 된다.

하늘이 예쁘다!
자.연.보.호. 라고 적혀 있다.

부펜드라(Bhupendra)씨에게 물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왜 안나푸르나를 오를까요? 힘든데.”

“글쎄요, 아마 자기 나라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아닐까요? 자연이 아름답잖아요.”     

그러면서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네팔 국화가 피는 나무예요. 네팔 국화는 ‘랄리구라스’라고 해요. 랄리는 빨간색을 의미하죠. 지금은 다 떨어졌지만 꽃이 피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런가? 자연을 보러 이 힘든 길을 걷는 것인가?

아직은 모르겠다. 조금 더 걸어봐야겠다.

네팔 국화 '랄리구라스'가 피는 나무.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11:00

고레파니(Ghorepani)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는 팀스(TIMS)를 등록해야 한다.     

다 도착한 줄 알았더니 우리가 머무를 숙소는 아직 더 올라야 한다고 했다.

아....... 그렇습니까?

WELCOM TO GHOREPANI
고레파니(Ghorepani) 마을 풍경.
팀스(TIMS)를 등록 중이다.

11:20

우리가 오늘 머무를 숙소에 도착했다. HOTEL SNOWLAND. 엘사공주가 살 것만 같은 이름이다.

어제는 도착해서 환타를 들이켰지만 여기는 도착하니 날씨가 쌀쌀했다. 그래서 따뜻한 홍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부펜드라(Bhupendra)씨가 ‘마늘국’이라고 하면서 쭉 마시라고 하셨다.

고산병에 좋단다. 아직 고산병이 찾아오진 않았지만 예방차원에서 쭉 들이켰다. 맛이 좋다.

12:30

몸을 녹이고 점심식사가 나올 때까지 난로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네팔도 우리나라처럼 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있다고 한다. 사립학교는 4학년부터 오로지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네팔어를 사용하면 벌금도 낸다.) 그래서 사립학교는 졸업한 아이들은 영어를 잘한다. 반면에, 공립학교는 영어교육을 하긴 하지만 사립학교만큼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도 마찬가지구나.     


점심을 먹고 쉬다가 날씨가 좋으면 일몰을 보러 푼 힐(Poon Hill)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보았던 맑은 하늘은 사라지고 안개가 가득하다.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점심은 ‘달밧’이다.

부탄 여행참가자분들이 네팔 가서 굶지 말라며 참치 캔과 볶음고추장을 주셨다.

덕분에 평소보다 밥을 더 많이 먹었다. 고맙습니다! 

역시 고향의 맛!

오늘은 걷다가 우연히 옆을 봤는데 구름이 정말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어떤가?

너무 빨랐다. 

그래서 천천히 걷기로 했다.     

‘느리게 걷자, 그리고 느리게 생각하자.’     


우리는 빠른 것에 너무 익숙하다.

대한민국은 빠르게 성장했고, 잘하는 것도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뭐든지 ‘빠르게 잘’ 해야만 인정을 받는다.     


‘쇼 미 더 머니’라는 힙합 경연 TV프로그램이 있다. 래퍼가 되고 싶은 일반인보다는 이미 래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본인을 더 알리기 위해 많이 나온다. 평소에 잘 하던 래퍼들도 본 무대에 올라가면 가사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한다. 방송 후, 댓글을 보면 그때부터 그 래퍼는 랩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노래 불러봐, 춤 춰봐 등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해보라고 요청받는 경우가 있다. 그 때 대부분 사람들은‘나 잘 못해’라고 답한다. 잘해야만 남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는 분위기다. 한 번 못하면 난 계속 못 하는 사람으로 규정될 테니까. 분위기가 그렇다. 


남들보다 빨라야 하고, 잘해야 한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자.

‘못해도,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자.      


느리게 걸으니 주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숨 쉬는 소리.

뒤에서 걷는 부펜드라(Bhupendra)씨의 발걸음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

.......     

마찬가지이다. 빠르게 걷다 보면 놓치기 쉽다.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느리게 걸으며 들어보자.     


우리 모두,

‘느리게 걸어보자, 그리고 느리게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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