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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호 Aug 14. 2023

우리 다음 일정이 뭐였지? P들의 신혼여행

제주 여자, 서울 남자의 신혼생활 이야기 ②

MBTI 검사를 하면 올리는 P 성향이 80%, 나는 65%라는 결과가 나온다. 즉, 우리는 '무계획이 계획'인 사람이다. 세 달 지난 신혼여행을 돌이켜보면, 미리 예약한 항공, 차량, 숙박 일정 외에 계획대로 움직인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같은 성향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신혼여행지는 '캐나다'로 정했다. '신혼여행은 휴양지로 가서 푹 쉬다가 오는 게 좋다'며 하와이, 발리 등을 추천받았다. 올리도 자연과 바다가 있는 곳을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캐나다 교환학생 시절에 로키산맥을 여행하며 느꼈던 감정들을 당신과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며 올리를 설득했다. (사실은 휴양지를 가고 싶지 않았다)

1. 이제 어디 갈까?

처음부터 계획이 없던 건 아니었다. 출발 두 달 전에 항공권 예매를 마치고, 비자도 신청했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가 신혼여행을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보다 일찍 준비했다며 서로 놀랐고, 만족했다. 우리는 P다)


야심 차게 구글 문서에 1일 차부터 7일 차 일정을 적고, 링크를 공유했다. 앞으로 이곳에 업데이트하자고. 그날 이후, 링크를 다시 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 일정대로 진행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일정을 소화했을까? '본능'과 '구글 맵, 안내 책자'에 의존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배가 고프면 식당을 찾았고, 지나가다 풍경이 예쁘면 차를 세웠다. 다음 행선지는 구글 맵에 남겨진 후기와 숙소나 관광센터에 비치된 책자를 참고했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려고 차를 탈 때면 항상 물었다. '이제 어디 갈까?'

나름 야심찬 계획이었다


2. 잠자다가 하루가 지났다.

나는 '밥'보다 '잠'이 중요하다. 끼니를 거르고 하루를 버틸 수 있어도, 잠을 못 자면 매가리가 없다. 신혼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지 특성상 차로 이동하는 일정이 많았다. 올리가 운전을 해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운전은 내가 도맡았다. 졸음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도착한 숙소 주차장에서 한 시간을 넘게 잤다. 창문을 열어 놓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들면,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 신기한 건, 올리는 그냥 내버려 둔다. 숙소 들어가서 자라고 하든가, 깨워서 다음 일정을 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실컷 자게 내버려 둔다.


더러 같이 자는 경우도 있다. 캔모어라는 도시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산불이 크게 나는 바람에 우리가 기대했던 풍경은 하나도 못 보고, 점심을 먹으러 들렀던 벤프 시내도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연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급격히 피곤해졌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시체처럼 침대에 뻗어, 세 시간을 내리 잤다. 밤중에 눈을 떴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 저녁 해 먹은 걸로 우리는 캔모어 일정을 마쳤다.   

3. 잠깐... 여기 게이 바(Bar)네?!

연기로 뒤덮인 로키산맥을 실컷 보고, 밴쿠버로 이동했다. 공항과 가깝고 번화가라며, 데이비 거리(Davie Street)에 숙소를 잡자고 했다. 대낮에 도착한 데이비 거리는 여행자 기분을 한껏 들뜨게 했다. 활기찬 분위기와 알록달록한 거리, 적당히 붐비는 이 거리에 우리는 도취했다. 숙소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고자 다른 동네로 움직였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여행 마지막 날을 이렇게 보내기 아쉽다며, 밖을 나섰다.


낮에 보던 풍경과 사뭇 달랐다. 쿵쾅거리는 비트와 요염한 사람들, 거리를 채우는 마리화나 냄새. 핫한 동네라며, 거리를 활보했다. 최대한 현지인들만 있는 바를 찾다가, 한 곳에 입장했다. 입장료를 냈고, 팔에 도장을 찍어 줬다. 유흥에 젬병이었던 우리는 그 도장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맥주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이상했다. 남자들만 보였다. 남자들이 진한 스킨십을 나눴다. 아?! 여기 게이 바(Bar) 구나.  


나는 경험이 있었고, 올리는 처음이었다. 게이 바(Bar)가 궁금했던 올리는 탐험을 시작했다. 잠시 사라진 뒤에 상기된 얼굴로 '저기 춤추는 곳이 있어!'라며 나를 이끌었다. 'Holy Shit!'을 연발할 수밖에 없는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대에는 올리가 유일한 여성이었다. 올리는 열광적으로 춤을 췄고, 난 그 뒤에서 나름 잘 즐기는 척 뻣뻣한 바운스를 하며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순간 나타난 네덜란드 여성과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고 있는 올리를 뒤로 하고, 나는 더욱 어두운 곳을 찾아 앉았다. 그 옆에는 네덜란드 여성의 친구로 추측되는 남성이 있었다. 서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내 맘 알지?)


데이비 거리는 밴쿠버에서 유명한 LGBT 거리였다. 잠시나마 머문 그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다.

4. 선물 뭐 사지?

신혼여행이라면 응당 선물을 사야 한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누구에게 선물을 줘야 할지 생각은 있지만, 역시나 목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사야 할 지도. 블로그와 유튜브를 열심히 검색한다. 그제야 깨닫는다. 마땅한 선물이 없다는 걸. 캐나다 과자, 메이플시럽, 각종 영양제가 주로 선물로 구매하는 물품인데, 우리가 사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스 와인이 괜찮았지만, 술은 2리터 이하로 2병까지만 면세 한도가 적용된다. (세금을 내고 아이스와인을 구매할까 고민했지만, 세금의 벽은 높았다) 결국 우리는 마땅치 않은 선물들을 잔뜩 사 왔다.


5. 짐 이렇게 보내면 추가 비용 내셔야 돼요.

무사히 일정을 마친 서로를 격려하며, 선물을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다. 무게가 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적인 예측을 하며 공항 카운터로 향했다. 세상은 P들에게 호락호락 않았다. 역시나 무게는 초과됐고,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우리는 힘들게 쌈 짐을 다시 풀었다. 기내에 들고 탑승할 수 있는 무거운 물건들을 하나둘씩 빼고 나서야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P들의 신혼여행은 끝났다. 계획대로 된 게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왜냐면 우리는 계획이 없었다. 짐작건대, 앞으로 우리 삶도 별다른 계획이 없을 거다. 매번 서울에 올 때마다 올리는 말한다. '이번에 서울 가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 지 계획을 세워보자.' 그러자고 답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앞으로 우리 삶에는 계획이 존재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 서두에 말했듯 우리는 '무계획이 계획'인 사람들이니까. 올리의 꿈은 '탐험가'다. 탐험가와 함께라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p.s 캐나다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우리한테 물어보세요. 우리처럼만 안 하면 반은 성공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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