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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Jul 31. 2023

통장잔고 같은 거야.

여름엔 정말 반찬 하기 싫다. 만든 반찬을 한 끼에 다 먹으면 그나마 낫다. 땀을 뻘뻘 흘려서 했지만 안 먹고 냉장고에 들어가는 반찬은 맛도 없고 며칠을 뱅뱅 돌다 결국 쓰레기통 신세가 된다. 재료도 아깝지만 땀 흘려서 만든 내 시간도 아깝다. 래서 여름엔 정말 반찬 하기 싫지만 식구는 4명이고 식사시간은 매일 3번 돌아오기 마련이다.


소고기를 싫어한다는 소리를 여러 번 했지만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만 하면 다행인데 어릴 때 못 살아서 못 먹어봐서 안 좋아하냐 묻는다. 돈 있어도 소고기 말고 돼지고기 사 먹던 아빠 덕분에 부유하게는 못 살았지만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은 다들 절약과 저축을 강조했고 사치와 낭비는 사회악이라고 했다. 사치와 낭비가 미덕이 된 지금은 절약과 저축이 사회악이다. 소비재의 생산과 공급, 자본주의의 노예들에게 지출은 늘 텅 빈 통장만 남긴다.


돼지고기 자주 사주던 아빠가 있던 중학교 시절에 동네에 작은 은행이 생겼다. 등하굣길에 있는 작은 은행에서는 오픈 기념으로 수건을 나눠주며 학생도 통장을 만들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 전교생이 단체로 저금하는 날이 있었고 나는 그때부터 손에 들고 있는 돈보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좋았다. 중학생은 고민 없이 통장을 만들었고 용돈을 받으면 늘 은행으로 달려갔다. 명절마다 친척들한테 받는 용돈도 조금만 쓰고 저금했다. 잔고가 쌓일 때마다 행복했다. 블록을 쌓듯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그 돈으로 뭘 할지 몰랐지만 그냥 좋았다. 중학교 3년 동안 40만 원 조금 넘게 돈을 모았다. 졸업과 동시에 적금 만기금을 받아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놀라고 기특해하며 좋아했다. 공부는 못해도 요런 건 잘한다면 칭찬했다. 엄마 안 줘도 된다고 나 쓰라고 하면서도 엄마는 봉투를 놓지 않았다.


여름엔 정말 반찬 하기 싫지만 차곡차곡해놔야 한다. 다진 소고기를 파, 마늘 듬뿍 넣고 간장 넣고 설탕 넣고 볶다가 고추장 넣어서 고추장했다. 통장 잔고를 쌓아가듯 반찬통에 조금씩 차곡차곡 넣었다. 소고기 별로 안 좋아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니 가득 넣어서 만들어둔다. 봉투를 놓지 않던 엄마처럼 밥그릇을 놓지 못하고 맛있게 먹을 식구들을 생각한다. 약고추장이 통장잔고처럼 예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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