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방학이면 농사짓는 할머니네로 간다고 했다. 사과도 따고 고구마도 캐고 옥수수도 따왔다고 했지만 시골에 사는 친할머니는 슈퍼를 했다. 농사짓는 동네 한가운데서 슈퍼 했고 농사는 거의 안 지어서 따올 사과도 고구마도 옥수수도 없었다. 슈퍼에 앉아 있다가 새우깡을 까먹거나 초코파이를 하나씩 먹는 게 다였다. 그것도 엄마가 많이 먹지 말라고 눈치 줘서 양껏 못 먹었다. 무엇보다 아빠와 안 친한 할머니라 자주 갈 일도 없었다. 외할아버지 집은 ('부자들이나 먹는 거야"를 읽고 오세요) 바다 보이는 오션뷰였다. 멍게나 해산물은 있어도 사과, 고구마, 옥수수밭은 없었다.
결혼하고 마트에서 채소와 푸성귀를 사 먹으며 예쁘고 비싼 그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못 생긴 거, 상처 난 거 마트에서 싸게 팔아도 거들떠도 안 봤다. 없이 사는 것도 아닌데 저런 걸 뭐 하려 하며 안 샀다. 이웃의 누군가 친정에서 받아왔다며, 시댁에서 많이 주더라며 채소와 푸성귀를 줄 때가 있다. 그들의 부모님 혹은 시부모님들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못생기고 상처 났지만 맛은 좋다며 내미는 이른바 유. 기. 농. 채소를 얻어먹으며 그 맛에 눈을 떴다. 마트 채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한 맛. 못 생겨도 껍질이 질겨도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아마도 유. 기. 농. 냄새려니 했다.
친정 엄마는 지하철역에서 5분 이상 떨어진 곳에 살아본 적이 없다. 자가용 없으니 교통 편해야 한다면 늘 시내 한가운데 살았다. 시부모님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시지만 그곳에서 농사 안 짓는 유일한 집이다. 어려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도움을 안 줬고 다 커서는 부모님들이 맛 보여주지 못한 유. 기. 농. 은 없어서 못 먹는 신세.
내 신세 한탄을 들은 건지 외삼촌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퇴직 후 제2의 직업이라도 찾은 양 농사에 진심을 다하는 삼촌은 부추며 배추며 양파를 근처에 사는 엄마 집에 두고 가신다. 엄마는 그럼 그중에서도 예쁘고 좋은 걸 골라 손질해서 우리 집으로 가져온다. 나는 그럼 그 유. 기. 농. 들을 자르고 조리고 무치고 볶는다. 평생 공무원만 하던 삼촌이 농사꾼이 되어지어다 준 유. 기. 농. 들. 가끔은 '마트에서 파는 게 낫겠군' 싶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맛이 순하고 향이 깊다. 이번 고추는 껍질이 너무 질기니 밀가루 무쳐 구워 먹으라는 엄마의 당부를 기억하고 튀김옷을 입혔다. 부추와 양파를 넣은 간장을 만들어 유.기.농.고.추.튀.김. 만들었다. 껍질은 좀 질기지만 향이 깊다. 어디서 이런 걸 받아먹겠나 싶다. 아껴 먹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릴 때 용돈 잘 주고 예뻐해 주던 외삼촌이 따다 준 고추는 달고 꼬숩다. 삼촌이 건강하게 오래 농사지어서 용돈 잘 주던 그때처럼 유. 기. 농. 잘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