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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Aug 02. 2023

유기농 고추튀김 먹는 신세

친구들은 방학이면 농사짓는 할머니네로 간다고 했다. 사과도 따고 고구마도 캐고 옥수수도 따왔다고 했지만 시골에 사는 친할머니는 슈퍼를 했다. 농사짓는 동네 한가운데서 슈퍼 했고 농사는 거의 안 지어서 따올 사과도 고구마도 옥수수도 없었다. 슈퍼에 앉아 있다가 새우깡을 까먹거나 초코파이를 하나씩 먹는 게 다였다. 그것도 엄마가 많이 먹지 말라고 눈치 줘서 양껏 못 먹었다. 무엇보다 아빠와 안 친한 할머니라 자주 갈 일도 없었다. 외할아버지 집은 ('부자들이나 먹는 거야"를 읽고 오세요) 바다 보이는 오션뷰였다. 멍게나 해산물은 있어도 사과, 고구마, 옥수수밭은 없었다.


결혼하고 마트에서 채소와 푸성귀를 사 먹으며 예쁘고 비싼 그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못 생긴 거, 상처 난 거 마트에서 싸게 팔아도 거들떠도 안 봤다. 없이 사는 것도 아닌데 저런 걸 뭐 하려 하며 안 샀다. 이웃의 누군가 친정에서 받아왔다며, 시댁에서 많이 주더라며 채소와 푸성귀를 줄 때가 있다. 그들의 부모님 혹은 시부모님들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못생기고 상처 났지만 맛은 좋다며 내미는 이른바 유. 기. 농. 채소를 얻어먹으며 그 맛에 눈을 떴다. 마트 채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한 맛. 못 생겨도 껍질이 질겨도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아마도 유. 기. 농. 냄새려니 했다.


친정 엄마는 지하철역에서 5분 이상 떨어진 곳에 살아본 적이 없다. 자가용 없으니 교통 편해야 한다면 늘 시내 한가운데 살았다. 시부모님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사시지만 그곳에서 농사 안 짓는 유일한 집이다. 어려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도움을 안 줬고 다 커서는 부모님들이 맛 보여주지 못한 유. 기. 농. 은 없어서 못 먹는 신세.


신세 한탄을 들은 건지 외삼촌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퇴직 후 제2의 직업이라도 찾은 양 농사에 진심을 다하는 삼촌은 부추며 배추며 양파를 근처에 사는 엄마 집에 두고 가신다. 엄마는 그럼 그중에서도 예쁘고 좋은 걸 골라 손질해서 우리 집으로 가져온다. 나는 그럼 그 유. 기. 농. 들을 자르고 조리고 무치고 볶는다. 평생 공무원만 하던 삼촌이 농사꾼이 되어 지어다 준 유. 기. 농. 들. 가끔은 '마트에서 파는 게 낫겠군' 싶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맛이 순하고 향이 깊다. 이번 고추는 껍질이 너무 질기니 밀가루 무쳐 구워 먹으라는 엄마의 당부를 기억하고  튀김옷을 입혔다. 부추와 양파를 넣은 간장을 만들어 유.기.농.고.추.튀.김. 만들었다. 껍질은 좀 질기지만 향이 깊다. 어디서 이런 걸 받아먹겠나 싶다. 아껴 먹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릴 때 용돈 잘 주고 예뻐해 주던 외삼촌이 따다 준 고추는 달고 꼬숩다. 삼촌이 건강하게 오래 농사지어서 용돈 잘 주던 그때처럼 유. 기. 농. 잘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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