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취학 무소유

by 주머니

잘 모르겠다, 나한테는 그런 게 없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한 번 더 말해 달라, 이해를 못했다는 말을 잘 못해서 관공서나 은행에서 그냥 돌아왔다는 어른들이 많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모른다는 말을 잘 못하는 게 아닐까? 한 번 더 물어보면 상대방이 싫어할까봐 지레 겁먹고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 나는 당당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럽다. 내가 부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유치원에 있다. 3월의 유치원에는 ‘나는 몰라요’, ‘나는 없어요’가 자주 들린다.

영어 선생님이니 인사부터 영어로 하면 우는 친구 발생.

“나는 몰라요.”

제일 많이 듣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다 모르니까 배우는 거라고 말하며 달랜다. 너도 이제 배우면 많이 알게 될 거라는 희망도 준다. 말에는 힘이 쎄니까 그 말은 진짜 이루어진다. 한 달만 지나면 나는 모른다고 울던 친구가 제일 크게 대답하고 제일 먼저 답을 맞춘다.

“오늘 날씨 어때요?”

“써니 써니 써니”

질문이 끝나기 전에 답을 하는 걸 보니 ‘몰라요’는 이제 조금 해결 된 듯하다.

사실 3월에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은 따로 있다.

나는 없어요!

몇 번의 교구 수업이 끝나면 교재 수업을 해야 할 시간이 찾아온다. 3월의 교재 수업 날은 정말 첫날만큼 힘들고 어렵다. 담임선생님이 도움을 주시지만 30분 안에 교재를 끝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30분이 3분처럼 느껴진다. 각양각색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유치원생들을 도와야 하고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핑크색 색연필 주세요.

12가지 색연필 중에서 핑크색은 단 하나. 각자 자기 색연필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교실에 구비된 색연필을 사용하는데 그 중에 자기가 원하는 색만 쓰겠다는 친구가 있다. 다른 친구가 먼저 집으면 걷잡을 수 없는 눈물 도가니에 빠지게 된다. 특히 핑크색에 대한 여자 친구들의 집착은 선생님이 나서지 않고 해결되기 힘들다. 모두가 핑크색은 쓰지 않는 걸로 하자는 결론을 내주면 갈색과 남색처럼 사랑받지 못하던 색들도 골고루 쓰게 된다.

2. 나는 안 하고 싶어요.

이 말의 속뜻을 알아야 한다. 그냥 안 하고 싶은 경우는 없으니까. 글자를 아직 모르거나 숫자를 못 쓰니까 하기 싫다는 진심을 알고 있는 나는 동그라미만 그려도 된다고 말해준다. 색연필 잡고 그냥 선긋기만 하면 된다며 글자와 숫자 몰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열심히 홍보한다.


그리고 이제 내가 제일 무서워할 말이 나올 차례다.


3. 나는 없어요.

선생님이 보여주는 그림이 본인 책에는 없다고 우는 친구가 있다. 한 장만 넘기면 되는데 두 장 넘기고는 무소유를 주장하는 어린이들에게 천천히 넘기라고 말해준다. 그때 옆에서 세 장 넘긴 친구도 자신의 책에도 없다며 울기 시작한다. 친구의 설움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따라 우는 친구도 있다. 천천히 한 장씩 넘기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니 찾아가는 서비스를 한다. 첫 교재수업을 하는 날은 미리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간다. 엄지와 검지에 밴드를 붙이면 책장을 넘기기가 조금 수월하다.

아직은 A4 크기의 책에서 종이 한 장을 넘기는 일도 힘들어 하는 그들은 ‘모르겠다’와 ‘없다’를 말하며 자신의 어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옆에 있는 누군가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천천히 스스로 하는 법도 익히게 된다. 그렇게 하나씩 배워나간다. 그리고 몇 달만 지나면 내가 넘기기도 전에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 문제를 풀고 있다. 선생님이랑 같이 넘겨야 한다고 말해도 몰래 먼저 넘길 줄도 알고, 못 찾고 헤매고 있는 친구를 도울 줄도 안다. 아, 청출어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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