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밥을 해주면서부터였다.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다가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들 밥을 차리는 것은 난이도 상 중의 상이었다. 몸에 좋으라고 애써 만든 반찬에 입도 안 대면 속상함은 극에 달했다. 제철 음식을 잘 먹어야 잘 큰다는데 걱정이 되어 유치원으로 전화를 한다.
“선생님, 저 승인이 엄마에요. 우리 승인이가 집에서는 나물 반찬에 손도 안 대서요. 유치원에서는 좀 먹을 수 있게 지도해 주세요.”
“네? 어머니 승인이 나물 잘 먹어요. 오늘도 시금치가 맛있다고 두 번 먹었어요.”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아이는 집에서는 나물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거 한 번 먹어보자, 제발 한 번만 먹어봐라, 이거 다 먹어야 TV볼 수 있다 으름장을 놓아야 겨우 한 두 개 맛만 봤다. 그런데 유치원에서는 다 먹고 다시 받아먹기까지 했다니. 내 요리 실력을 탓하는 대신 급식이 되게 맛있나 보다 하며 안도했다.
안과 밖이 다른 아이. 당신의 아이는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는 분명 달랐다.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부터 그랬다. 집에서는 낮잠 자기 싫다고 보채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보다 길었다. 그런 내 말을 믿기 힘들다며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은 내게 동영상을 하나 보내주셨다. 1분 30초 가량의 충격적인 영상에는 이불을 깔자마자 좋아서 달려가 눕는 아이가 바로 눈을 감고 잠들 준비를 하더니 점점 깊이 잠이 들었다.
‘거짓말. 저럴 수는 없어. 내 아이가 아닌 것 같아.’
증거를 보고도 믿기 힘들었지만 분명 우리 아이였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는 집에서와 원에서 다른 모습을 했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에서와는 다르다. 예의 바르고 차분한 친구의 엄마를 유치원 앞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 수업시간에 진짜 의젓해요. 자세가 너무 바르고 멋있어요.”
“우리 @@이가요? 하아, 집에서는 30초도 가만히 못 앉아 있는데요. 우리 아들이 사회생활을 잘 하겠네요. 하하하하.”
선비가 따로 없다고 칭찬했던 친구의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섰다. 안에선 산만, 밖에선 의젓 친구의 어머니도 나와 비슷해 보였다. 밖에 나와서 그렇게 잘 할 거면 집에서도 좀 그렇게 해보라는 원망과 배신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마한테 하듯이 버릇없고 못난 행동을 선생님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안에서는 좀 새지만 밖에서는 안 새는 바가지라 다행이었다. (우리 아들에 해당입니다.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자른 것 같거든요)
초록초록한 6월의 그 날도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에 조금 일찍 들어갔다. 수업까지 몇 분이 남기도 했고 아직 교구 정리하는 친구들도 있다. 자리에 먼저 앉은 친구들의 근황 인터뷰 시작.
“오늘 점심 맛있게 먹었어? 뭐가 제일 맛있었어?”
“국물이요.”
“돈까스요.”
“깍두기요.”
방금 먹은 맛있는 점심을 생각하며 메뉴를 읋어 주는 인터뷰어들. 그 중 한 친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의 자신의 도전을 칭찬해 달라는 듯이.
“선생님, 나 오늘 오이 먹어봤어요. 원래 못 먹었는데 오늘 잘 먹었어요. 진짜 바삭바삭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갤러리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오이 진짜 바삭해.”
“응. 난 원래 좋아해. 바삭하잖아.”
오이가 바삭바삭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오이는 바삭바삭이 아니라 아삭아삭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오이 유경험자에게 박수를 치며 틀린 단어 찾기 하듯 말했다.
“대단하네. 선생님도 아삭아삭한 오이 좋아해.”
그러자 선생님이 좋아하는 오이와 자신이 좋아하는 오이는 조금 다른 건가 싶어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뭐가 틀렸는지 말해주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틀린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친구 입에는 오이가 바삭거리고 돈까스가 아삭거렸을 수도 있다. 지금은 문법적 오류를 찾기보다 집에서는 먹지 않던 오이에 도전한 것만 칭찬하기로 했다.
‘얘들아, 그래도 오이는 아삭아삭이고 돈까스가 바삭바삭이야. 사회생활 잘 하려면 이런 거 배워야지.’
목까지 나오는 말을 겨우 참고 교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