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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에게 배운 동변상련

by 주머니

4세도 이제 나를 보고 우는 친구는 없었다. 내가 보이면 달려와서 안기고 매달리는 친구들이 대부분. 낯가리고 힘들어하던 봄날의 4세였지만 이제 여름처럼 쨍하고 신나게 알려준다.

“나 빵구 꼬뗘”

나는 교육자니까 그 상황에서도 교육을 해야 한다.

“‘방귀 꼈어요.’ 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그걸 듣고 따라하는 여름 같은 4세.

“빵구 꼬떠요.”

방귀까지 튼 사이라 나도 좀 편해진다. 하기 싫다고 투덜거려도 해야 된다고 달래고, 옆 친구가 자리 없게 했다고 울어도 근엄하게 말한다.

“‘친구야, 좀 비켜줄래.’ 해야지 울지 말고.”

“‘띤구야 쫌 비꾜줄래.’ 이르케?”

교육자로서의 위신은 생각지 않고 웃지 않을 수 없다. 일부러 내기도 힘든 저 혀 짧은 소리를 들으면 화를 내기도 어렵다. 그래 참 잘했다 하며 수업을 시작한다.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며 4세 반의 문을 열었는데 낯선 울음을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새 친구가 와서 그렇다면 이해해 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울고 있다는 새 친구는 이사를 오면서 기관도 옮겼다고 했다. 이사를 와서 집도 낯선데 다니던 어린이집도 바꿨으니 얼마나 힘들까. 엄마 마음이 되어서 아이를 보지만 낯선 나를 보고는 더 크게 운다. 담임선생님은 우는 아이를 안고 교실 뒤에서 수업 참관을 한다. 엉엉 울던 아이는 선생님 품에서 우는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자리에 가서 앉아 보겠느냐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담임선생님과 나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그녀의 자리로 안내한다. 조금 앉아 수업을 듣더니 갑자기 울먹이며 내게 말한다.

“@@이 엄마 보고 지퍼. 엄마한테 가고 지퍼.”

나는 @@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도.”

“떤쌩니미도 엄마 보고 지펑?”

“아니. 선생님도 우리 아기 보고 싶어.”

“떤쌩니미 아기는 오디 이써?”

“유치원에 갔어. 선생님 여기 와서 @@이랑 수업해야 되니까 유치원에 갔지. 그러니까 @@아. 우리 조금만 참고 엄마 보러 가자. 친구들도 다 엄마가 보고 싶은데 참고 있어. 엄마는 @@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일도 하고, 청소도 하고, 동생도 보거든. 그러니까 우리 어린이집에서 수업 재미있게 하고 나서 반갑게 엄마 만나러 가자. 어때?”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 못한 듯하다. 그래도 아이는 자기 앞에 앉은 어른도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다는 말에 공감한 듯 작게 운다. 딱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도 같다. 수업이 끝날 때는 살짝 웃기까지 했으니 전학생의 첫 수업도 성공적이다.


다음 주 수업을 하러 갔더니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아침 등원할 때는 너무 울었다더니 그래서인지 소리는 없고 눈물만 뚝뚝 흐른다. 슬픈 아이에게 그만 울라는 말은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수업을 준비하는 나에게 말을 거는 아이.

“떤쌩니임. 나 엄마 보고 지퍼. 떤쌩니미도 아기 보고 지펑?”

예상치 못한 질문.

“어? 어어. 그렇지. 선생님도 아기 보고 싶어.”

@@이는 눈물을 닦고 바른 자세로 앉으며 이야기 한다.

“그럼 우디 빠리하고 가다. 나는 엄마 보더 가게. 떤쌩니미는 아기 보더 가.”

아, 동변상련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구나. 다 큰 어른도 자신과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에게 관대해진 4세의 인류애라니. 웃음이 날 만큼 귀엽지만 그녀의 비장한 표정을 보니 나도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래, 오늘은 선생님이 최선을 다해 수업을 해보마. 우리 이 수업이 끝나면 보고 싶은 이를 만나러 가자. 눈물이 나올 새도 없이 즐겁게 수업을 하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러 가자.’

다짐을 하며 수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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