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수업 가는 유치원은 4곳이다. 보따리 장사처럼(실제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다닙니다) 가방을 메고 이 동네 저 동네의 유치원으로 수업을 다닌다. 그래서 동네마다 차이가 난다는 그 생활수준을 직접 보고 느끼기도 한다. 원어민 튜터가 집으로 온다는 친구도 있고, 할머니와 살아서 사투리를 완벽하게 습득한 친구도 있다. 나도 한 번도 사 본 적 없는 명품 옷을 계절별로 입고 오는 친구도 있고, 형아가 입었던 옷이라며 유서 싶은 전통을 자랑하는 친구도 있다. 공평하지 못한 선생님이 부잣집 아이만 표 나게 예뻐해도 되던 시절의 학생이었던 나는 공평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라 자꾸 무너지게 된다. 완벽한 사투리 구사자가 조금이라도 영어를 더 배웠으면 해서 다른 친구보다 한 번 더 게임을 시켜준다. 형아가 입던 옷을 자랑스러워하는 친구의 어머니 한국어가 서툰 걸 알게 된 후로는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정확히 말해주려 애썼다. 나 역시 공평하지 못하면서 겉으론 되게 그런 척한다.
몇 주씩 보이지 않던 친구들이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되어 돌아오면 물었다.
“@@이 어디 다녀왔어?”
“베트남이요.”
“비행기 타고 괌 갔어요.”
“필리핀 한 달 살기 하고 왔어요.”
다녀온 곳도 제각각이다. 식구들이 하루 종일 붙어 지내며 물놀이하고 맛있는 거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왔다며 서로 자랑하기 바쁘다. 바다를 헤엄치는 거북이를 봤다고, 배 타고 나가서 돌고래를 만났다고 말하는 얼굴이 아직도 흥분돼 보였다. 그 사이 까매진 얼굴이 누구보다 반짝거리는 친구가 손을 번쩍 든다.
“나는 바다 갔다 왔어요. 할머니랑 누나랑 갔는데 할머니는 우산 쓰고 있어서 발만 까맣게 됐어요. 미역도 보고 소라도 봤어요.”
발음과 억양까지 완벽한 사투리로 자랑하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부럽다고 말했다. 선생님까지 부러워하는 멋진 여행을 하고 왔다니 친구들도 한 마디씩 보탰다.
“미역 잡았어?”
“소라 잡아서 먹었어?”
“바다에서 고래 봤어?”
모든 질문에 다 답을 했다간 수업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내가 나서서 장내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수업이 시작하려 할 때, 유서 깊은 옷 즐겨 입는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응?”
“나는 집에 있었어요.”
“아, 그래? 더운 날 밖에 나가면 사람도 많고 집에 있으면 좋지.”
대충 그렇게 마무리하려는데 옆에 앉은 참견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크게 물었다.
“왜 놀러 안 갔어?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유치원생들은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거르지 않고 질문을 하는 게 아니지만 대놓고 돈이 없느냐 묻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내가 나서려는데,
“아니. 아빠가 여름에 엄청 바빠서 돈 많이 벌어. 겨울에 놀러 갈 거야. 우리도 베트남 갈 거야.”
다행이었다. 혹시나 정말로 돈이 없어서 못 갔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으니까. 참견 쟁이 여자 친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좋겠다. 우리 엄마는 휴가철에 움직이면 돈 많이 든다고 못 간대. 여름에는 에어컨 밑이 제일 시원하다고 집에 있었어. 그래서 피자랑 치킨 먹었어.”
말하며 웃었다. 그러니까 나도 너처럼 집에만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럼에도 우리도 행복하지 않았느냐고, 비행기 타고 가서 바다는 못 봤지만 집에서 시원하게 있는 것도 진짜 여름휴가 아니겠냐는 동질감의 표현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있는 시간은 행복하다. 엄마 아빠가 제일 좋다는 유치원 친구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진짜 행복임을 안다. 비행기 안 타고, 바다 못 봐도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행복을 즐길 줄 안다. 좁은 베란다에서 엄마와 어깨를 부딪치며 물총놀이 한 게 제일 재미있었다고 유치원에서 자랑했다는 우리 아이만 봐도 행복이 뭔지 안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어 여행 못 간다는 소리 대신 베란다라도 나가 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보다 친구랑 노는 게 더 좋다는 소리 하는 때가 온다. 더운 여름 언제 가나, 언제 가나 하다가 잠깐이면 가을이 오는 걸 해마다 겪어봤다. 언제 크지, 언제 크지 하다 돌아서면 금방 자라 있다. 작년까지도 유치원생 동생이랑 물놀이하던 사춘기 누나가 있는 우리 집에서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생활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고, 엄마가 제일 좋다는 뜨거운 사랑고백이 사라지고 가을바람처럼 쓸쓸한 말만 주고받게 될 때가 온다. 생각보다 금방 온다. 여름이 가고 가을은 반드시 온다. ‘벌써 가을이네, 시간 참 빠르다’ 하면서 서글퍼하지 않기 위해 지금을, 여름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