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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Nov 14. 2022

경단녀 엄마, N 잡러 되다.

엄마, 경단녀가 되다 ㅡ 1

 어쩌다 마흔이 되었나 싶지만 시간이 지나니 마흔이 되었다. 첫 아이는 이제 6살이라 크게 손가는 일이 없었다. 유치원 보내고 난 오전 시간에는 가끔 ‘심심하네. 일이나 해볼까?’ 생각하던 내 나이 마흔에 둘째의 임신을 알게 되었다. 놀랍지만 감사했고, 불안했지만 벅찼다. 마흔에 임신이라니. 마흔 하나에 아이를 낳고 나면 둘째가 20살이 되면 나는 60살이었다. 60살은 한참 남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20대에도 마흔은 한참 남은 것 같았지만 금방 되어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금방 60살이 될 것이다. 그럼 그때는 뭘 해야 하지? 지금이야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한다지만 아이를 20살까지 키우려면 50대에도 60대에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임신 막달까지 와 버렸다.


 그렇게 41살에 둘째를 낳았다. 아이를 임신하고 병원을 다니는 동안에도 최고령의 임산부였고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조리를 하는 동안에도 최고령의 엄마였다. 한 친구는 전화로 내게 물었다. “너 그런데 젖은 나오냐? 마흔 넘어서 애 낳아도 젖이 도냐?” 다가올 갱년기를 걱정하던 친구는 나의 출산 축하와 함께 흥미롭다는 듯이 모유의 생산 가능성을 물어왔다. ‘나온다! 돈다!! 돌까지 모유 먹여서 키웠다!!!’ 호기롭게 말하고 싶지만 친구는 둘째에게 모유 수유하는 흰머리에 탈모까지 된 나를 보러 와서는 말했다. “요새 분유 좋아. 애쓰지 말고 분유 먹여도 돼.”      

 

 어쩌다 경단녀가 되었나 싶지만 시간이 지나니 경단녀가 되었다. 아이를 낳았고 키우며 금방 되어버렸다. 그리고 주위에는 수많은 경단녀들이 있었다. 육아 휴직 중인 대기업이나 공무원 엄마들이 아니면 대부분이 경단녀였다. 그녀들도 나와 비슷했다. 결혼하기 전에 하던 일을 첫 아이 낳기 전까지 했다. 간호사로 일했고, 작은 회사의 경리 업무를 보았다. 복지관에서 복지사로 일을 하다가, 어린이집에서 교사로 일을 하다가 경단녀가 되었다. 나처럼 아이를 낳았고 키우다 보니 그렇게 경단녀가 되었다는 그녀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인 지금이 좋다는 경단녀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니었다. 다시 일하고 싶다고, 아이는 이제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 가니까 그 시간에라도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전에 일하던 곳에서 그렇게 편의를 봐주지 않을 것 같다고, 또는 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 반찬거리와 유행하는 감기 걱정으로 경단녀로써의 일 걱정은 희미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이가 있으니까. 그까짓 경단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목숨과도 안 바꿀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비록 낳는 고통보다 더한 수유의 고통을 1년간 겪어야 하지만, 밤에는 수시로 깨서 젖을 달라는 통에 통잠 좀 자보자며 불면의 밤을 지새우지만,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첫 아이 등원을 위해 달리는 유치원 버스를 붙잡아야 하지만 아이가 있으니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내 인생 최고의 존재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힘들지 말아야지 한다고 다짐하고 다짐해도 힘듬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파서 힘들고, 못 자서 힘들었다. 우울해서 힘들었다.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다. 아이를 낳고 힘들지 않은 엄마는 없다고 너만 그런 거 아니니 유난 떨지 말라고 눈치를 주는 남편과 요새처럼 애 키우기 편한 시절이면 열은 낳았을 거라는 어른들의 말은 그런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러니 아이들은 언제나 아빠 말고 엄마만 찾는 거라고. 그랬으니 아이들은 어른들이 이리 오라고 해도 쭈뼛거리며 가지 않는 거라고 말하지도 않아도 아는 건 엄마들뿐이다.      

 몸과 마음을 다해 아이를 키우지만, 이 사랑에 과연 끝이 있을까 싶지만 힘은 들었다. 엄마는 사랑받는 만큼 힘든 자리였다. 그런데 힘들다 소리를 하지 못했다. 힘들다 소리를 하면 늘 돌아오는 말은 “애는 예쁘잖아. 애 크는 거 잠깐이야. 지금은 힘들어도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야.” 같은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친구는 내게 모유수유 가능성을 묻던 친구 한 명뿐이었다. “난 임신한 여자들 보면 불쌍해. 낳아서 어떻게 키우냐. 그 힘든 걸 어찌할까 싶어서 딱해.”라고 말하는 친구의 아이들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었다. 아이들 어릴 때 생각하면 너무 귀엽지만 치열하고 전쟁 같던 육아를 생각하면 다시 그 과정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친구는 내게 남들 얘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제일 후회하는 건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돈 아깝다는 남편 때문에 도우미를 쓰지 않아서 집안일을 하느라 아이들에게 짜증 냈던 거라고 했다. 그러니 도우미를 쓰든 남편을 붙잡고 늘어지든 네가 살 길을 찾으라고 말했다. 다 늙어서 애 낳은 것도 힘든데 키우는 건 무조건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럼 그렇지. 다들 멀쩡해 보이고 별 것도 아닌 쉬운 일처럼 말했지만 육아는 그토록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겪어봤던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다니. 등산하면서 정상의 위치를 묻는 내게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가면 된다고 말하는 하산하는 어른들 같았다. 차라리 정상은 아직 멀었지만 조금 가다 보면 평지가 있으니까 거기서 조금 쉬고 다시 올라가라고 말해줬다면 그 평지까지 힘을 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생겼다. 평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둘째가 드디어 어린이집이라는 평지에 등원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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