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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r 25. 2023

사람 쉽게 변한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

겨울초 겉절이( feat 도토리 묵 )

우리는 겨울초라고 불렀다. 동초라고도 하고 유채나물이라고 하고 시나난파, 춘재, 월동춘재라는 이름이 있다고 한다. 봄이면 노랗게 피어나는 유채꽃대라는 걸 결혼하고 알았다. 저 유채가 그 유채구나 했다.

 

찬바람이 불면 엄마는 늘 겨울초(부산은 거의 이렇게 불러요)를 사 와서 새콤달콤하게 무쳤다. 삼겹살과 먹으면 장아찌가 필요 없는 맛이다. 마땅한 반찬이 없는데 겨울초가 보이면 계란 프라이를 해서 고추장 조금 넣고 참기름 넣어서 밥이랑 같이 쓱쓱 비벼 먹었다. 알싸하고 아삭거리는 겨울초는 나도 좋아했지만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채소 반찬이었다.


3살 많은 언니는 공부를 잘했고 그림을 잘 그렸고 노래도 잘 불렀고 뭐든 잘했다. 그런 언니랑 초. 중학교를 같이 다닌 내가 선생님들한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니 ㅇㅇ 이 동생이라매? 느그 언니는 다 잘하는데 니는 와 이렇노?" 였다.

언니는 다 잘했다. 형제자매가 첫 번째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나는 언니의 라이벌 축에도 못 꼈다. 순하고 착한 언니를 최선을 다해 괴롭히고 귀찮게 하며 이겨 먹으려 했다. 매일 싸웠고 매일 언니가 미웠다. 언니가 나랑만 놀면 좋겠는데 친구들이랑 논다고 하면 드러누워서 나도 데려가라고 했다.

그런 언니가 긴장하고 무서워하는 시간은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언니는 다 잘했지만 입이 짧아서 안 먹는 반찬이 많았다. 소금 바른 김이나 먹고 김치 몇 조각 먹는 게 다였다. 가지나물 고사리나물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생선조림은 비려서 냄새 맡기도 싫어했다. 멸치볶음도 안 먹던 언니는 늘 먹는 반찬 한 가지만 가지고 밥을 먹었다. 아침밥을 안 먹으면 학교도 안 보내던 아빠는 그런 언니를 한참 지켜보다가 손도 안 댄 반찬을 먹으라고 했다. 착하지만 고집은 셌던 언니는 그때부터 입을 닫고 밥을 안 먹었다. 언니가 입을 닫고 안 먹기 시작하면 밥상에는 긴장이 감돌고 아빠가 곧 큰소리친다는 걸 알기에 나는 눈치껏 이것저것 다 먹으며

"언니야, 무봐라. 이거 맛있다."

언니 밥그릇에 조금 놓아주었다. 다 잘하는 언니라 샘이 났지만 밥상에서 혼이 나면 나도 밥을 제대로 못 먹으니 정말 싫었다. 제발 좀 먹으면, 왜 이걸 안 먹지 싶었던 입 짧은 언니였다.


언니가 좋아하던 겨울초가 나오면 그날 밥상은 즐거웠다. 언니는 겨울초를 밥그릇에 가득 덜어서 먹으며 웃었고 아빠도 편하게 저녁을 드셨다. 아빠는 언니가 공부만 하느라 눈이 나빠져서 알이 굵은 안경을 쓴다고 했다. 채소는 가리지 말고 먹어야 한다고 좋은 말로 타일렀다. 겨울초를 입에 가득 물고 언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니는 공부보다 만화책을 더 많이 봤다는 걸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몰랐다. 고사리나물도 잘 먹고 가지나물은 없어서 못 먹고 생선조림을 직접 만들어서 잘도 먹는 지금의 언니를 본다면 아빠는 뭐라고 할까?


입맛이 변해서 안 먹던 반찬이 다 맛있다는 언니가 변하지 않고 좋아하는 겨울초다. 찬 바람 부는 12월부터 겨울초가 보이면 설렌다는 듯이 말한다. 겨울초가 나왔다고 지금이 맛있을 때라며 빨리 무쳐 먹어야겠다고 한다. 설레어하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나도 겨울초를 찾으러 나서 본다. 대가 여리고 부드러운 겨울초를 찾았으니 11살 딸이 좋아하는 텁텁한 도토리묵도 산다. 겨울초도 묵도 살살 조심조심 부서지지 않게 무쳐 본다. 겨울초가 너무 맛있다며 아삭아삭 씹어 먹는 딸을 보니 언니가 보인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반찬이 나와서 눈이 반짝반짝해지고 입꼬리가 올라간 어린 언니가 언뜻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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