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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마늘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

참 매운 시집살이

by 주머니


‘이 남자랑 결혼해야지' 생각이 들었던 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의 여자 친구와 밥이나 한 끼 했으면 한다면서 만난 식당이었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서울말을 쓰셨고 어머니는 특별히 말씀이 없으셨다. 불편한 첫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식사가 끝나고 따뜻한 물을 직원에게 부탁했다. 종이컵에 물이 나왔고 어머니는 뜨거운지 들기 조심스러워했다. 아버지는 재빨리 일어나서 정수기 옆에 손잡이가 있는 유리컵을 가져오셨다. 종이컵에 있는 뜨거운 물을 그 컵을 옮겨주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부부로 늙고 싶었다.

그때 아버지가 컵을 바꿔주는 것만 안 봤더라면, 컵을 바꿔주며 종이컵에서 나오는 환경 호르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잔소리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결혼을 안 했겠지. 다정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컵을 바꿔줬다고만 생각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는 실제로 다정하고 좋으셨다. 그러나 종이컵을 쓰면 환경 호르몬이 나오는데 이 식당은 생각 없이 이런 데다 뜨거운 물을 준다고 계산이 끝나서까지 잔소리를 하시는 것이 일상이신 분이었다. 다정함과 잔소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신혼 때는 시아버지의 잔소리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경상도 아빠의 딸이었던 나는

"아는?", "밥 묵자", "자자"

소리가 아빠들이 하는 말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시아버지는 안 그랬다. 한 시간도 두 시간도 말씀하시길 좋아했다. 신혼집의 화분 위치를 바꾸라고 하셨고, 싱크대의 찬장을 열어보며 양념통의 위치를 바꾸라고 하셨다. 식탁을 이쪽으로 옮겨보라고 하셨고 베란다는 블라인드 치지 말고 밝게 하라고 하셨다.

"아버님, 나 싫어하셔? 너무 하신다. 살림하는 것도 잔소리를 하시니까..."

"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잔소리해."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아버지는 어느 식당에 가도, 백화점 매장에 가도 늘 잔소리를 하셨다. 빵집에서 케이크 포장을 기다리다 주인에게 의자 너무 많이 놓지 말라고 하셨다. 처음 만났던 식당에서 시어머니가 말씀이 없으셨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아, 곧 종이컵에 대해 잔소리를 하겠구나.' 하셨던 거다.

그런 시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어서 남편에게 짜증을 내다 부부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동안 잔소리보다 도움 받은 게 더 컸다. 아이들 출산마다, 이사할 때, 대학을 다닐 때 시아버지는 늘 지갑을 여셨다. 큰 아이 낳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내게 전화해서 돈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셨다. 힘들어하는 며느리에게 뭘 해줘야 하는지 몰랐던 시아버지는 비상금까지 주려 하셨다.

"너네 엄마도 모르는 돈이 나한테 있어. 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아버지가 돈 줄게."

잔소리보다 마음을 더 많이 내어주신 분이 작년 여름에 쓰러지셨다. 늦은 밤 몸이 이상하다며 남편에게 전화를 한 시아버지는 수술 후 깨어나기 힘든 상태라고 했다.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계시던 한 달은 잔인했다. 슬픔을 주체 못해 가족들은 싸우고 부딪히기도 했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다는 시어머니의 바람은 중환자실 면회 금지라는 말에 막혔다. 그 지루하고 길었던 시간 속에서 잔소리가 그리웠다. 10년 동안 핏줄도 아닌 사람에게 받은 게 많아서 미안하고 슬펐다.

봄이 되니 시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으시고 왼손으로 내 손도 잡으신다. 반 년 만에 만난 며느리를 반가워하신다. 어서 일어나서 집으로 가자하니 웃으며 알았다 하신다. 반 년 넘게 환자식만 드시던 분이 이제 일반식도 드실 수 있다. 병원에서 나오는 식사가 입에 맞지 않는지 잘 못 드신다는 시어머니 말씀에 소고기로 장조림을 만들었다. 두 번의 임신마다 빈혈이 심했던 나를 위해 시아버지는 늘 소고기를 덩어리로 사주셨다. 빈혈약보다 소고기 좋다며 약이라 생각하고 끼니마다 먹으라고 냉동실 가득 소고기를 채워주셨다. 그 분을 위해 소고기 장조림을 만들어 본다. 고기 냄새 없애고 향도 좋으라고 꽈리고추랑 통마늘도 넣었다. 병원 밥으로 어떻게 힘이 나겠냐며 며느리가 맛있는 소고기 갈아서 장조림 했으니 잡수라 했다. 나만 보면 웃으시던 시아버지는 이제 왼쪽 얼굴만 움직여 환하게 웃으시며 왼손으로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하신다. 고추랑 마늘은 간호하는 시어머니께 드시라고 했다. 살이 쏙 빠지신 시어머니는 미안하다 하신다.

도대체, 당신들은 뭐가 고맙고 미안합니까?

내게 준 것들이 반찬 정도로 퉁쳐집니까?

시집살이 참 맵다. 매워서 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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