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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Apr 17. 2023

그 많은 김밥은 누가 다 먹었을까?

내가 다 먹었지

김밥을 좋아한다. 우리 엄마 김밥은 밥은 쪼끔 들어가고 재료는 가득이다. 꼬마 김밥처럼 두께가 얇은 엄마 김밥은 소풍 때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늘을 가득 넣은 시금치나물을 김밥에 넣어주면 김밥을 먹었는데 김치를 먹은 듯 냄새가 났다. 그래도 좋았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대부분 김밥집에서 김밥을 사 왔다. 엄마도 귀찮으니까 사서 가라고 했다. 난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사 먹는 김밥은 밥이 맛이 없고 너무 컸다. 엄마가 싸주는 김밥은 안 그랬다. 크기가 작으니 세 줄도 네 줄도 먹었다. 엄마는 소풍 때마다 '귀찮아, 귀찮아'하며 은박도시락에 김밥을 싸줬다. 다 큰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소풍날은 엄마 김밥을 싸다녔다.


2000년대 이후 김밥집이 동네마다 생기기 시작했다. 천국 같고 나라 같은 김밥집들이 생겨나서 처음에는 몇 번 사 먹었다. 맛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김밥을 싸달라고 하면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귀찮아서 이제 그런 거 못 하니까 사 먹으라는 엄마가 야속했다. 대학도 졸업했고 소풍도 못 가니 핑계를 대고 싸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엄마 김밥을 성인이 되고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김밥을 자주 쌌다. 식구들이 좋아하고 내가 좋아해서 그랬다. 남편은 이런 김밥은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모든 김밥 재료를 생으로 넣으셨다고 한다. 야채는 당연히 생으로 넣었고 햄은 어차피 조리되어 나왔다며 자르기만 해서 넣었다고 한다.) 딸은 어려서부터 김밥을 좋아했다.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가면 어른 손가락만 한 크기로 김밥을 쌌는데 작게 싸기가 너무 어려웠다. 김밥이 조금만 크면 안 먹고 남겨오는 딸 덕에 마냥 작게 더 작게 싸야 했다.

둘째가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소풍을 간다며 도시락을 준비하라고 했다. 둘째는 김밥을 안 먹는다. 확히는 김밥에서 단무지와 야채, 김을 안 먹는다. 김밥이 보이면 그것들만 빼달라고 한다. 지 입에 맞게 작게 싸줘도 소용없다. 그것들만 빼라고 하니 김밥 싸는 것보다 그것들 빼는 게 더 힘들었다. 김밥을 싸주면 안 먹을게 뻔하니 좋아하는 소시지와 야채를 넣어 볶아서 주먹밥을 한다. 이 아이도 역시 유전인지 조금이라도 크면 남겨온다. 지 입에 맞게 50원짜리 동전 크기로 만든다. 소시지로 꽃밭을 만들고 계란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둘째의 담임 선생님 도시락을 은박 도시락에 준비했다. 김밥보다 손이 덜 가는 게 유부초밥이니까 하며 시작했지만 이것 역시 시간과 공이 든다. 김밥 못지않게 일이 많다는 걸 다하고서야 알았다. 치울 생각을 하니 고되지만 좋아하는 주먹밥과 꽃소시지와 하트계란을 먹을 아이를 생각하니 즐겁다. 엄마도 그랬겠지. 귀찮아,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김밥을 싸주던 우리 엄마도 그랬겠구나 한다. 사랑한다, 예쁘다 소리 들어본 적 없는 경상도의 딸은 주먹밥을 싸며 김밥을 싸주던 엄마의 사랑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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