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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Apr 14. 2023

십 대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싸움보다 볶음

딸은 5살에 공주병과 핑크병을 앓았다. 유치원 원복을 입어야 하는 날도 핑크색 드레스만 입겠다고 고집부렸다. 얼굴보다 큰 리본을 달고 싶어 했다. 원복만 꺼내면 기겁을 하고 울었다. 겨우겨우 달래서 원복을 입혀 보냈지만 구두만은 포기 못한다며 원복 츄리닝에 구두를 신고 갔다. 까칠하고 예민한 딸을 공주처럼 키우기 위해 나와 남편은 기꺼이 하녀와 하인이 되어야 했다.


유치원에서도 딸은 까칠했다. 친구랑 같이 교구도 나누지 않고 미끄럼틀도 혼자 탔다. 잘 울고 잘 삐치는 전형적인 핑크공주였다. 선생님들께 미움받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예민하고 손 많이 가는 남의 아이를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했다. 담임 선생님과 상담전화를 하던 날 딸의 까칠함으로 힘들지 않은 지 물었다.

"아니요. 그 또래 여자친구들은 다 그래요 어머니. 그런데 우리 진아는 밥을 너무 잘 먹어서 좋아요. 나물반찬도 잘 먹고 김치도 잘 먹어요. 미역줄기 나오면 두 번씩 받아서 먹어요. 사실은... 제가 미역줄기를 못 먹는데 진아가 너무 맛있다고 먹는 거 보니까 기특했어요. 편식 없이 잘 먹어서 너무 예뻐요."

선생님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 초반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첫사랑에 실패 없이 아이를 낳았다면 그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딸 같은 마음이 들었다. 미역줄기 못 먹는 담임선생님이라고 놀리지 않기로 했다. 미역줄기 잘 먹는 우리 딸을 예쁘게 봐달라며 남의 집 예쁜 딸에게 아양을 떨고 상담을 마쳤다.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딸에게 자주 해주던 반찬이었다. 미역줄기는 변비가 있는 딸에게 좋다며 자주 해줬다. 양파를 같이 넣어서 볶으면 단맛이 돌아서 잘 먹었다. 깨소금 많이 넣고 참기름 둘러서 볶으면 밥 한그릇은 쉽게 비우게 하는 반찬이었다. 무엇보다 미역줄기는 너무 쌌다. 천 원어치도 팔고 이 천 원어치 사면 2주도 넘게 먹었다. 미역줄기만 보면 맛있겠다고 좋아하던 영유아기의 딸은 이제 십 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제일 좋고 주말에는 친구랑 놀고 싶다는 십 대가 된 딸은 많이 컸다. 몸도 많이 컸지만 마음도 많이 컸다. 어떤 말이 엄마를 아프게 하는지 알고 싫은 질문에는 대답 없이 입을 닫는다. 다 큰 듯이 건방을 떠는 게 밉다가도 밥 잘 먹으면 예쁘다. 과자 말고 버블티 말고 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면 싫어하는 걸 알지만 꼭 안아서 뽀뽀를 해준다.

오랜만에 미역줄기를 샀다. 염장된 미역줄기를 물에 담갔다 볶기 시작했다. 방에서 핸드폰만 보던 딸은 저녁 반찬이 뭔지 보러 나왔다. 미역줄기를 볶고 있으니 참새처럼 입을 벌린다.

"아~엄마. 아~"

하며 간도 덜 된 미역줄기를 달라고 한다. 맛있다 소리를 몇 번이나 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핸드폰 하는 딸은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 공주병과 핑크병에 빠졌던 딸은 이제 치마는 입지도 않고 핑크색은 양말에 있는 것도 싫어한다. '조금 있으면 남자친구도 생기겠지, 엄마가 뭘 아냐며 방문을 쾅 닫겠지, 날 왜 낳았냐며 원망하겠지'하며 곧 다가올 시련을 미리 두려워 한다. 그렇게 힘든 날은 싸움 대신 미역줄기를 사야겠다. 잡지 못하는 머리채 대신 두꺼운 미역줄기대를 쭉쭉 찢어야겠다. 먹기 좋게 쫑쫑 썰어서 볶아야겠다. 싸움보다 볶음을 택하며 사이좋게 지내야지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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