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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y 07. 2023

인류애 하나 인종차별 하나

젠. 젠. 젠 젠틀맨이다.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임을 자랑한다. 노란 머리에 하얀 피부를 하고 영어를 쓰는 외국인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지만 까만 피부에 작은 체구를 가진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 앞에선 한없이 거만을 떤다. 미혼 시절에는 주중에는 유치원  영어강사하느라 힘들었다며 주말에 펍에 자주 갔다. 영어 쓰는 백인 남자가 말을 걸면 잘 받아주고 데이트 비슷한 걸 하기도 하고 썸을 타기도 했다. 영어 쓰는 흑인 남자와는 정확하게 선을 그으며 친구만 했다. 영어 쓰는 동남아 남자가 말을 걸면 대답도 잘 안 해줬다. 난 유교걸이라 외국인 남자와 거리를 두는 거라며 필리피노 영어 강사와 술 한잔도 안 했지만 캐네디언 영어 강사와는 몇 년을 베프라며 술도 마시고 파티도 따라다녔다. 백인에겐 다정하게 흑인에겐 거리를 두고 동남아인에겐 무시해도 누가 뭐라 하지도, 양심에 가책도 못 느꼈다.


결혼하고 유치원 영어강사를 안 하니 심심했다. 동네 복지관에서 필리피노가 영어 수업을 한다고 해서 갔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 필리피노 영어 강사는 한국말을 영어만큼 잘했다. 수업 내내 못 알아듣는 한국인들을 위해 영어 말고 한국어로 설명을 했다. 수강생 대부분이 회화가 거의 안 되는 정도라 나는 강사에게 수업을 못 듣겠다고 했다. 강사도 내게 맞는 수업이 아니라고 했다. 영어 할 친구가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도 줬다. 한국인 수강생들은 몇 번의 수업이 끝나고 복지관에 건의했다고 한다. 필리피노의 발음은 별로이니 진짜 원어민 강사를 구해달라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건 회화가 아니라 발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필리피노 영어 강사는 내게 속상하다고 영어로 빠르게 말했다. 수업에 온 사람들이 영어를 이해 못 해 한국어로 말했더니 자기를 무시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사람과는 절대 한국어로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영어로만 말하라고 했다. 마트든, 병원이든, 학교든 아이랑 같이 가면 더 영어로만 말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필리피노 영어 강사는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원 영어 강사를 작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5살 아들을 키우며 5살 영어 수업을 하면 고되지만 재밌다. 몇 주전에 소아과에서 학생과 그 엄마를 만났다. 아이 엄마는 한국으로 유학 온 중국 사람이다. 아이도 엄마도 한국말은 못 하고 중국어와 영어를 했다. 아이는 5살이라 남들 앞에선 부끄러워서 어떤 말도 안 했다. 엄마는 병원에서 간호사와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그 엄마에게 다가가 영어 선생님이라고 인사하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영어를 잘했다. 아이 증상을 설명해야 하는데 한국어 하는 친구가 오늘 안 와서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고 내게 한국어 문장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영어로, 영어로만 말하라고 했다. 간호사가 아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쳐다봤다. 통역 안 되니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컴퓨터 화면 보고 말했다. 아이 이름만 봐도 한국아이는 아니고 나와 한참을 같이 이야기하는 걸 봤으니 그랬을 거다. 영어 한다고 했다. 학생의 엄마도 영어로 간호사에게 증상을 설명하니 간호사는 웃으며

"과장님께 말하시면 돼요" 하며 진료실로 모셨다. 간호사는 날 보며 살짝 웃었다.


오늘은 어버이날 전날이라 기장에 갔다. 기장에는 멸치잡이배가 있다. 멸치를 잡아와서 그물을 털고 있는 사람들의 10에 9명은 외국인이다. 예전에는 손짓발짓으로 그들에게 일을 시켰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국말을 다 잘했다. 옆을 더 잡으라고 그물을 털라고 말했다. 가까이 서서 구경하는 내게

"아줌마 비키세요." 하며 기장 어부처럼 나무랐다.

이제 힘든 일든 다 저런 사람들이 하는구나 했다. 일이 없어 힘든 한국 사람들은 힘든 일은 안 해서 돈이 없다. 돈이 없는 외국 사람들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한다. 70년대 80년대의 한국 사람들처럼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린다.


동남아도 아니고 중동 어딘가에서 왔을 것 같은 외국 사람이 사탕 두 개를 들고 우리가 앉아 있는 카페 테이블로 왔다. 기장 어부 같은 옷을 입고 사탕 두 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어디서 보고 있다가 귀신같이 팔러 왔다 싶었다. 둘째가 핸드폰 내놓으라고 카페가 떠나가게 울던 중이었다.

"아니, 됐어요. 안 삽니다." 나는 그를 아래위로 훍터보며 차갑게 말했다.

"애기 주세요. 애기 울어서요." 배우처럼 잘 생긴 그는 사탕보다 더 달콤하게 웃으며 말하고 갔다.

"아이고 고마브라" 엄마는 외국인지도 몰랐다. 한국말을 하도 잘하니 몰랐다고 했다.

"우와 팔러 온 줄 알았는데 감동이네" 언니는 말했지만 나는 그 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애기 울어서 사탕 가지고 온 사람에게 안 산다고 말한 나는 사탕값을 줘야 하나 커피를 사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는 밖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크라도 한 조각 사줘야 하나 싶었지만 말았다. 그가 영어를 하는 백인인데 사탕을 받았다면 젠틀맨이라고 추앙했겠지. 감히 커피나 케이크를 사주겠다는 마음도 못 먹었을 것이다. 인류애를 발휘한 그를 인종차별한 나는 부끄러웠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바닷가로 가는 젠틀맨의 뒷모습이 참 멋지다. 사탕 껍데기를 까서 금쪽이에게 대접하는 나 따위가 커피를 대접하기엔 그는 너무나 젠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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