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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y 11. 2023

악마는 고등어를 입는다

이 영광은 모두 최면 덕분입니다.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반찬들이 있다. 김치 깐 고등어조림은 그중에서도 상위권이다. 통통한 고등어를 쌀뜨물에 씻어서 김치를 바닥에 깔고 양파 가득 대파 가득 넣고 마늘은 심하게 많이 넣고 매운 고추를 두 개 정도 넣었다. 그렇게 엄마가 고등어조림을 만들면 나는 옆에서 훈수를 뒀다. 고춧가루  넣으라고, 달게 하지 말라고 했다. 상추는 있냐 물으면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된 고등어조림 국물은 칼칼한 김치찌개 같으면서 고등어 기름이 섞여서 고소했다. 상추 한 장을 손에 올려 금방 한 밥을 넣고 고등어 살이랑 김치 한 점을 넣는다. 국물을 안 넣으면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라며 엄마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푹 떠서 쌈 위에 부었다. 입이 터지게 큰 상추쌈은 고등어맛, 김치맛이 섞인 환상의 콜라보였다.


열 손가락 상위권에 있는 반찬이지만 생선 비린내를 싫어하는 남편덕에 결혼하고는 열 번도 못 먹었다. 엄마집에 가야 먹을 수 있는 반찬이라 그리워했다. 신혼 초에 겁 없이 만들었던 고등어조림은 내 입에도 비리고 맛없었다. 남편은 냄새부터 빼자며 밥도 안 먹고 향초를 켜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생선 요리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며 나를 다독이며 "우리 라면 먹을까?" 하던 남편에게 미안했다.


마트에서 고등어가 싱싱해 보이면 그 앞을 서성였다. 짝사랑하는 남자애 보려고 학원 다니던 고등학생처럼 쭈뼛거리며 고등어를 훔쳐봤다.

'먹고 싶어. 김치 가득 깔아서 해 보고 싶어'

그런 마음을 못 이기는 날은 고등어를 샀다. 이렇게 싱싱한데 비린내 안 날 거라며 고등어한테 최면을 걸었다. 최면을 제대로 못 배워서인지 무를 깔고 김치를 깔고 맛술을 넣고 고등어를 우유에 담갔다 만들어도 비린내가 났다. 이제 고등어조림 포기하라는 남편은 후레이크 먹으면 된다며 저녁을 포기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렇게 실패했다. 고백은 못 하고 짝사랑만 하던 그때처럼 마음이 쉽게 접어지지 않았다. 마트에서 고등어 한 마리 3천 원이라고 했다. 3천 원이면 실패해서 버려도 미련 없지 않겠냐며 내가 나를 설득했다. 조림하게 한 마리만 손질해 달라고 했다. 짝사랑에게 건네지 못한 편지처럼 고등어를 고이 모셔왔다. 김치를 깔았다. 양파와 대파도 가득 넣고 마늘도 평소보다 많이 넣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본 레시피보다 설탕을 조금 더 많이 하고 간장을 많이 넣었다. 뚜껑을 덮고 고등어조림에게 최면을 걸었다.

'비리지 마. 제발 비리지 마. 그만 비리란 말이야.'


보글보글 끓어오르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맛을 봤다. 아. 최면은 하다 보면 느는 거다. 고등어조림이 안 비리다. 국물이 칼칼하고 달달하고 맛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미원이라도 넣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제 자리로 넣었다. 남편을 위해 소시지를 구웠지만 굳이 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래도 남편한테는 비릴 수 있으니 비상용 소시지도 담았다. 한 냄비 가득 끓인 고등어조림은 국물만 조금 남고 없다. 한 접시 가득했던 소시지는 반도 넘게 남았다. 고등어가 소시지를 이기다니, 면이 드디어 통했다니 기뻤다. 상추에 싸 먹으니 맛있다며 남편은 국물 버리지 말고 내일 밥 비벼 먹자고 했다.


이제 좀 쉬어야지 하고 소파에 앉으니 고등어를 온몸으로 먹은 듯 냄새가 난다. 프라다를 입은 악마처럼 고등어를 입은 아줌마가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명품 고등어조림 냄새를 음미하고 있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어야 하겠지만 오늘의 이 영광은 폭풍성장한 최면 돌린다는 수상소감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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