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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y 09. 2023

11년 산 오이 무침

오이가 신혼에 빠진 날

3층 짜리 빨간 벽돌집에 살았다. 언니가 쓰는 옥탑방은 법적으로 층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내 계단이 있는 우리 집이 2층이고 언니 방이 3층이라고 우겼다. 빨간 벽돌 2층집이라고 누군가 우리 집을 말하면 속으로 3층집이라고 말했다. 남들은 2층이라고 말하고 나는 3층이라고 말하던 집 1층에는 두 세대가 세 들어 살았다. 남자아이 둘이 있는 젊은 부부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살았다. 왼쪽에 살던 남자아이 둘 있는 집은 대문을 다르게 썼다. 남자아이들이 유별나서 아빠가 별로 안 좋아했기에 오며 가며 인사 정도만 했다.


오른쪽에 살던 신혼부부네는 대문을 같이 썼다. 대문을 열면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그 옆에는 그 집 현관이 있었다. 아빠도 엄마도 그 신혼부부를 좋아했다. 신혼의 아내는 학교 갔다 오는 나와 마주치면 엄마 나가셨다며 코코아 마시고 올라가라고 했다. 우리 엄마가 그런 부탁을 했을 리 없는데 친절하게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 집에 놀러 가는 걸 좋아했다. 어린 내 눈에도 그 신혼의 고소함이 좋아서 놀러 갈 이유를 찾았다. 현관문이 열려 있으면 빼꼼히 들여다보며 인사했다.


저녁 시간에 놀러 갔던 날 신혼의 아내는 오이를 깎고 있었다. 반찬 할 때 구경하기 좋아하던 나는 다른 집에선 오이를 어떻게 먹나 궁금했다. 엄마는 껍질을 조금만 깎고 동그랗게 잘랐다. 식초 가득 넣고 고춧가루 많이 쳐서 마늘향이 오이향보다 많이 나게 맵고 달고 새콤하게 무쳐줬다. 신혼의 아내는 오이 껍질을 완전히 다 깎았다. 긴 오이를 반으로 잘라서 어슷하게 썰더니 굵은소금을 뿌렸다. 옆에서 구경하며 나는 뭐 하는 거냐 물었다. 오이에 소금을 뿌려둬야 간이 잘 배어서 맛있다고 했다. 우리 엄마가 하는 오이보다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신혼부부네 식탁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았다. 우리 집 식탁과는 달랐다. 예쁜 커피잔과 앙증맞은 티스푼을 구경하고 있으니 그 예쁜 잔에 코코아를 담아줘서 티스푼으로 쪽쪽거리며 떠 마셨다.


코코아를 마시고 나니 오이를 물에 씻어서 물기를 짜고 있었다. 신혼의 아내옆으로 가서 오이 무침하는 걸 지켜봤다. 고춧가루 조금 넣고 깨소금 조금 넣었다. 식초도 조금 설탕도 조금 넣고 무쳤다. 마늘이 안 들어가니 오이의 시원한 향만 났다. 맛있어 보여 한 입만 달라고 했다.

'아, 신혼의 맛이여!'

싱겁고 어색하고 아마추어 같은 딱 신혼의 맛이었다. 맛이 어떠냐고 묻는데 나는 맛있다 대답을 하며 집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만들어준 진하고 노련한 오이무침이 먹고 싶었다.


11년 전 신혼이었던 내 오이무침도 그랬다. 싱겁고 자신 없어 맛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달게 먹어주던 남편이 있었다. 오이 무침 하나 만들면서 땀을 뻘뻘 흘려도 재밌었던 시간이었다. 이제는 없어진 그 풋풋함과 순진함이 조금 아쉽지만 11년이란 시간은 진하고 노련한 오이무침을 선물한다. 아무리 맛있게 해도 무심하게 먹는 남편이 있다. 11년 뒤에는 더 깊은 맛을 내는 오이무침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여름 오이를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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