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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y 05. 2023

여성용 김밥 남성용 김밥

어른용 김밥 어린이용 김밥

비는 어린이날 외출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핑계다. 폭우가 쏟아진다고 몇 차례 안내 문자까지 오고 보니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못 나간다는 확신까지 들게 한다. 초등 4학년 딸과 유치원 1년생 아들이 맞는 어린이날이지만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고 영상 보고 먹었다. 아침에는 누룽지를 먹고 점심은 시켜 먹었다. 케이크는 어제 사놔서 촛불 불고 먹었다. 이제 조금 심심해진 어린이들은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맛있는 거 먹자고 했다.


'시켜 먹고 싶어. 밥 하기 싫단 말이야'

속마음을 크게 말하고 싶지만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딸은 내게 무슨 선물 줄 거냐며 할머니들께 받은 용돈을 셈하고 있다. 아들은 먹고 눕고 놀고 울다가 할머니가 준 용돈이라니 집어던지고 간다. 착한 어린이들에게 뭘 해줘야 하나 게으른 어른은 냉장고 안을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김밥이 먹고 싶다지만 단무지도, 시금치나물도 없다. 당근도 반쪽뿐이다. 그래도 굳이 먹고 싶다는 어린이를 위해 시켜주려고 배달앱을 켰지만 게으른 어른도 양심은 있다. 두 끼를 시켜 먹자니 죄인 같다.

어묵을 채 썰어 간장과 요리당에 졸여서 달고 짜게 만든다. 어린이들을 위해 계란과 소시지를 넣는다. 계란과 소시지가 밥보다 커야 하므로 밥은 최대한 얇게 편다. 어묵볶음이 들어간 밥은 달고 짜서 그냥 먹어도 맛있다. 계란의 고소함과 소시지의 MSG는 그 맛을 더 빛나게 한다.


어묵조림에 매운 고추를 곁들여 어른을 위한 김밥을 만다. 너무 매울 수 있으니 마요네즈도 곁들인다. 매운 김밥을 보고 달려오는 딸에게 그거 매울 거라고 했다. 하나 먹고는

"이게? 맵다고?"

하며  차근차근 먹는다. 남편에게 매운 김밥을 하나 권하니 너무 맵다며 손도 안 댄다. 많이 먹으라며 내쪽으로 밀어주며 소시지와 계란이 든 어린이용 김밥을 먹는다.

아들과 남편은 아니 남자들은 소시지와 계란이 든 김밥을 선호한다. 딸과 엄마는 아니 여자들은 매운 고추가 들어간 김밥을 즐긴다. 성별의 차인가? 나이의 차인가? 아마도 나이의 차이겠지. 초등 4학년보다 더 애 같고 유치하고 어린이 같은 남편에게는 어린이용 김밥이 어울린다. 엄마 마음을 헤아리고 동생도 가끔 돌보고 아빠 좀 이해하라는 친구 같은 딸에게는 어른용 김밥이 어울린다. 남자 어린이 두 명이 김밥을 놓고 소시지만 빼먹지 말라고, 계란 큰 거 내 거라며 싸우고 있는 비오는 어린이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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