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단수이 강변을 걷는다. 워낙 넓은 폭을 가지고 있어 이게 강인 지 바다인 지 그 경계가 애매하다. 단수이 강은 흘러 대만해협으로 간다. 강에 한동안 시선을 두자니 들뜬 마음이 넘실거린다. 주변의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도 밝아 보인다. 어제의 사람들에게선 보지 못한 여유가 묻어나는 것도 같다.
지나가다가 좀 팬시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기로 한다. 가격은 어제 우리가 요기했던 어떤 허름했던 가게보다 20배 정도를 더 받았지만 강변을 풍경삼아 먹는 음식과 맥주는 그 정도 값어치를 충분히 할 것이다.
야외 테이블에 앉는다. 정면으로는 단수이 강이 흐른다. 강 너머로 빠리 섬도 보인다. 우리가 곧 건너갈 곳이다. 앞쪽으로 커다란 나무의 가지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오고 간다. 조깅하는 여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남자, 나들이 나온 가족,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커플, 그 아래서 헥헥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프렌치 불독까지. 개인적으로 정적인 상태로 동적인 대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좋아한다. 유동하는 다양한 집합체들을 가만 관찰하는 것은 그것만의 재미가 있다.
음식은 특별히 맛있진 않았지만 단수이 강이 한껏 맛을 보태준 덕에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가 되었다. 스테이크와 치킨이 어우러진 맥주는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한 입씩 먹을 때마다 줄어드는 맥주가 아쉬울 뿐이다. 눈 앞에 단수이 강을 두고 여유로이 들이키는 맥주 한 모금에 난 비로소 여행을 실감한다.
한낮 더위에 겉옷을 벗는다. 이윽고 강바람이 분다. 쌀쌀한 기운에 겉옷을 다시 입는다. 그럼 또 금방 더워진다.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 한참을 반복한다. 강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테이블로 떨어져 깜짝깜짝 놀란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참 오래도 앉아 있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페리 선착장으로 간다. 우리가 페리를 타고 갈 곳은 저 건너편 빠리섬이다. 사람을 가득 채운 페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람이 많이 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십 분 정도 흘러 빠리에 내린다. 빠리는 아까 있던 단수이 지역보다 여유롭고 한적한 분위기이다. 우린 자전거를 타고 해변가를 달리기로 한다. 마치 이건 우도에서 전기차를 탔을 때의 느낌이다. 한 시간이면 섬 한 바퀴 다 돌려나, 하며 지도를 보니 섬이 생각보다 크다. 한 시간으로 될 만한 크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유유자적하며 적당한 거리까지만 돌아보기로 한다. 사람도 자전거도 거의 없어 운전하기도 수월하다. 자전거를 타며 가르는 바람이 꽤나 시원하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 상쾌한 공기가 저 깊은 곳까지 들어서는 느낌이다.
자전거가 슬슬 힘에 부칠 때쯤 반납을 하고 다시 페리를 타 단수이로 건너간다. 단수이 역으로 되돌아 가는 길 커피 누가 크래커로 유명한 세인트피터가 보인다. 거기서 몇 가지 맛을 시식하고 오리지널과 커피맛으로 몇 상자 산다. 무거운 손으로 관광을 이어갈 수 없어 숙소에 들러 짐을 두고 다시 나가기로 한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겸 행한 곳은 시먼딩이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지라 가볍게 누들류를 먹고 바로 건너편 삼 형제 빙수로 가 망고빙수를 먹는다. 서울에도 다 있는 것들인데 이상하게 외국에만 오면 이곳의 유명하단 음식들은 다 먹어 주어야 직성이 풀린다. 양이 엄청나게 많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벌칙으로 한 숟가락 크게 떠먹기도 해 보며, 남은 양을 줄여 나간다. 그럼에도 다 먹지 못한 채 자리를 뜬다.
거리에 발마사지샵들이 즐비하다. 생각해보니 발마사지를 포함해 한 번도 마사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대만에서 내 인생 첫 발마사지를 받아 보기로 한다. 몇몇 가게들 앞을 서성이다가 사람이 꽤 많아 보이는 가게로 들어간다. 50분간의 발 전문 마사지 코스를 선택한다. 족욕부터 시작해 발, 종아리를 마사지하는 순서로 진행되는 코스이다.
내게 배정된 마사지사는 언뜻 보아도 그 가게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이셨다. 인상은 좋아 보였으나 좋은 인상과 별개로 힘은 부족한 듯싶었다. 옆에선 아프다고 난리인데 난 왜 이렇게 평안하고 아무 느낌도 없고 잠만 솔솔 오는 걸까. 내가 발 쪽에 통각을 상실했단 말은 여태 못 들어 봤으니 아무래도 이건 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프냐고 옆에서 물어 오는데 이걸 뭐, 어떻게, 대답해야 될까 싶다. 마사지사가 아프냐고 묻는데 이건 더 뭐, 어떻게, 어떤 표정으로, 대답해야 될까 싶다. 아프다고 말해야 저분이 마사지사로서 자부심과 만족감을 가지시려나. 내가 솔직하게 안 아프다고 하면 저분에게 괜스레 상처가 되지 않을까 잡다한 생각이 들어 "it's okay."라고만 하고 만다.
그분은 계속 내 표정을 살피며 "okay?"라고 물었고, 난 표정관리에 신경 쓰며 "okay."라고 답했다. 말 그대로 오케이의 향연이었다. 올해 들어 가장 많이 사용한 영단어이다. 누가 내 발을 만지고는 있는데 지압은 됐고 이걸 마사지라고나 부를 수 있는 행위인 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아니 이건 마사지가 아니다. 아씨, 내 돈.
분명 마사지 가게에 들어와 마사지 의자에 앉아 마사지사에게 마사지를 받는데, 어째 마사지만 빠져 도통 보이질 않는다. 마사지로 잔뜩 도배된 이 곳에서 난 끝까지 마사지만은 만날 수 없었다. 마사지를 받는 내내 다신 마사지를 안 받을 거라 생각했다. 수없이 "okay."를 외치면서도 그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다. 나만 이런 것일까, 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표정 변화가 없어 저들의 생각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게 마사지라면 난 다신 안 받고 싶을 뿐이었다.
마사지가 끝나길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고 무료했다. 마사지 시간을 맞춰둔 타이머가 울리고 난 드디어 인내의 고통에서 해방돼 자유의 몸이 된다.
밖에 나가니 비가 쏟아지고 있다. 마치 여름 장마철처럼 비가 사방에서 퍼붓고 있다. 이 거센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타이베이의 밤을 즐기고 싶다. 시먼 홍러우 뒤쪽에 노천 술집들이 많다 하여 그곳으로 간다. 비가 많이 와 사람들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모든 술집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여행객보다도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아온 현지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이 폭우를 뚫고 거리로 나온 그들을 보자니 불금은 역시 불금인가 보다.
그 거리의 아무 술집이나 들어간다. 겨우 빈자리를 찾아 칵테일을 시킨다. 옷을 살피니 아무리 우산을 썼대도 비가 여러 방향에서 여러 리듬으로 몰아친 바람에 옷이 꽤 젖었다. 이러다 감기 들면 안 되니깐 칵테일 한 잔씩 하며 서둘러 오늘 밤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보낸 어제와 오늘을 회상하고 우리가 보낼 내일과 모레를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