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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Oct 11. 2021

이별은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


"며느라" 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좋았다. "며느라" 이 소리 뒤엔 늘 좋은 것들이 따라왔기에 언제나 기분 좋은 기다림이 있었다. "며느라 간이 어떠냐? 맛나지" 손에 들고 있던 나물을 입에 쑥 넣어주셨다. "며느라 밥은 꼭 챙겨 먹거라" 애 키우느라 바빠도 끼니는 거르지 말라며 살갑게 챙겨주셨다. "며느라 이거 따시더라. 신어보거라" 겨울이면 늘 손, 발이 찬 날 주시려 시장에서 사 온 두툼한 양말을 건네주셨다 "며느라 택배 보냈으니 맛나게 먹거라" 자갈치시장에 있는 것들을 봉지봉지에 담아 얼음까지 사 넣어선 집으로 보내주셨다. 며느라, 며느라... 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는 늘 통통 튀었고 밝았다. "며느라" 이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았고 반가웠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그렇다는 거다.


"며느라" 부르는 소리가 날 부르는 말이 아닌데도 귀는 쫑긋 세워진다. 그리고 내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나는 이내 헛헛해진다. 난 더 이상 "며느라"로 불릴 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을 잃는 건 이름을 잃는 일인 것 같다. 날 불러줄 어머니가 안 계시니 "며느라"를 들을 일이 없다. 그 소리가 듣고 싶어도 나를 그리 불러 줄 한 사람이 없기에 들을 수가 없다. 오로지 그 한 사람이 부르던 이름이기에 그 사람이 아닌 누가 날 "며느라" 하고 불러줄까...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어 괜히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던 날도 있었다. 더는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신호 가지 않을걸 알면서도, 전화기를 누르던 날이 있었다.


"호호 어머니"

처음 볼 때부터 가시던 날까지 어머니는 내게 호호 어머니셨다. 늘 온화했고 부드러웠고 따사로웠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볼 때면 내 기분도 좋아져 따라 웃게 되었다. 웃는 얼굴을 "호호"라는 말에 담아 어머니는 내 폰에 "호호 어머니"로 저장되어 있다. 어머니 전화가 올 때면 "호호 어머니" 글자가 먼저 보였고 전화받기 전부터 내 입은 호호거리며 웃게 되었다. 전화 너머에서 "며느라" 소리가 들리면 나는 편해졌고 걱정마저도 없어졌다. 아직도 어머니는 내게 "호호 어머니"이고 아마 평생 그러할 듯하다. 지울 수 없는 이름! 지운다고 없앤다고 사라질 이름일까...


처음 보던 날 어머니는 볶은콩을 내주시며 "이거 먹어보거라. 몸에 좋단다" 하셨다. 커피도 아닌 과일도 아닌 볶은콩을 주셨다. 콩이 담긴 그릇이 소박하고 수수했었다. 잘 먹지도 않는 콩을 입에 넣어 오독오독 씹으니 고소한 향이 입안에 퍼졌고 어머니도 구수하게 느껴졌었다. 볶은콩만큼 어머니는 담백하고 꾸밈없으셨다. 둥글둥글하니 부드러웠고 사람을 어렵게 하는 것도 없으셨다. 내가 니 시어미 될 사람이라는 도도한 기운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부드럽게 손잡아 주셨고 가만히 눈으로 웃어주셨다. '어디 있다 이제야 왔느냐'는 반가움만이 눈 안에 가득했다. 나도 어머니가 처음 볼 때부터 좋았었다. 넉넉해 보이는 첫인상이 좋아 내 어머니로 하고 싶었었다. 뭐든 담아 둘 깊은 속이 있을 거 같았고 뭐든 안고 품어줄 푸근함이 있을 거 같았다. 살짝 벌려진 입으로 반쯤 웃음 띤 얼굴이 좋았고 등을 쓸어주는 두툼한 손도 좋았다. 껌뻑 껌뻑 나를 다정 시리 바라보는 순한 눈빛도 좋았다. '내 며느리가 될 것이니 이젠 내 품속에 지니고 내가 보듬어야지...' 하는 눈빛도 느껴졌었다. 그런 든든한 어머니 둥지 안에서 내 새끼도 놓고 키우며 나는 엄마가 되어갔다. 이젠 그 둥지를 떠나야 할 때가 지났건만 아직도 난 그 둥지를 버리고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있다.


마트 가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며느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걷던 길, 그 어디에도 어머니가 없는 걸 알면서 '어머니가 날 부르는 걸까? 혹시 저 뒤에서 오고 계시나? 같이 가자 걸어오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날 부르는 "며느라"가 아니었다. 아담하니 정 많고 푸근하게 생긴 내 어머니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했던 내 어머니가 아니었다. 곱게 양산을 들고 있는 나이 든 여자와 커피를 든 젊은 여자가 나란히 걸으며 서로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들이 "어머니" "며느라" 주고받는 말에 눈치 없는 귀가 또 쫑긋한 거였다. 어머니를 이젠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서운했다. '며느리라는 말에 쫑긋하지 좀 마! 널 그리 불러 줄 한 사람이 없잖아. 알면서 왜 그래?' 들리는 걸 들은 것뿐인데 애먼 귀만 탓했다. 속절없이 밀려오는 그리움에 풀이 죽었다.


아련한 냄새를 쫓는 듯 옅게 흩어진 기억을 쫓았다. 한때 같이 걸었던 길이기에 어딘가엔 어머니가 흘리고 갔을 추억이 있을 거 같아 두릿두릿 살폈다. 언제였는지, 어디였는지 기억은 잊힌 채 다정한 뒷모습만 남은 어머니와 내가 길을 걷고 있다. 그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다.


며느라!

어머니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말.

둘 사이를 단단히 엮어 정들게 한 말.

낯선 둘을 가까이 붙여주었던 그 말이 좋았다.


"며느라" 불러주던 어머니가 멀리 가시면서 며느리라는 이름도 같이 가져가셨다. 이젠 누구도 날 며느리라 불러주지 않는다. 다정했던 그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불릴 땐 그게 좋은 줄 몰랐었는데... 그것도 한때구나. 잃고서야 알게 된다. '며느라' 들을 때가 좋았었구나.

그 이름 하나가 무어라고 잃어버리고 나니 빈자리가 허전하기만 하다.

헤어짐이란 이런 거구나.

이름을 잃어버리는 거구나.

"며느라" 곰살스럽던 그 말이 귓전에서 뱅뱅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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