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인지, 어제 일어난 건지 구별이 가지 않는 때가 있었다. 하루가 너무나도 길고 힘들었다. 3학년이 되고 나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잘 안했는데,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게 아닐까. 당장에 닥친 일들, 할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가 있는 그런 식이었다. 차라리 별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이게 고3이지 싶었다. 그 일이 있었던 때도 이제 1달이 넘어간다. 정말이지 더 힘들어졌다. 공부에만 온전히 나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으면 좋겠었다. 너무 힘들어서 수학 문제 풀면서 요즘 인기있는 여름 플리를 듣고 있었는데 너무 그 가사들이 감동적이었다.
‘다 이겨낼 거리고 믿어요. 눈물을 닦고 편히 쉬어요. 고생했어요 그대여. 겁먹을 필요 없어요. 소중히 간직하길 바라요. 그 꿈이 진짜가 될 때까지’
문득 의사 선생님과 약사님들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공부하는 거 힘들지? 조금만 더 힘내라.”
“잠올 수 있는 약인데 너무 잠오면 공부해야 하니까 약 절반만 드세요.”
그들이 고등학생들에게 하는 말들은 어쩌면 자신의 치열했던 고등학교 생활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약국에 동생 영양제를 사러 갔었는데, 약사님이 그거 말고 이게 좋다며 철분제인데 자기도 공부할 때 이런거 먹었다며 추천해주셨었다. 자기의 고등학교 시절이 계속 생각나나보다.
고3이라 마음에 여유도 없고 다들 자기 몸 가누기도 힘들고 벅찬 걸 질 알아서 내가 아프고 힘들어도 그 사정을 다 얘기하기 어려웠다. 걱정해줄 걸 잘 알면서도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사람 신경쓸 여유도 없을 뿐더러 그럴 에너지가 남아 돌지도 않는다. 다들 힘들어하고 하루에도 몇 명씩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론 나도 눈물을 흘렸지만. 공부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공부에만 몰두하기도 벅찬데 외부적으로 신경쓸 게 너무 많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혼자 있고 싶고, 인간관계로 스트레스 안 받고 싶고. 모든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어도 모쪼록 다 잘 해결되어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길. 나도 나의 에너지를 잘 간직해서 좋은 기운 나눠줘야겠다 생각했다.
나와 에너지 템포가 비슷한 사람과 있어야 편안하고, 기가 빨리지 않을 수 있다.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사람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눈은 뜨고 다녀야 되니까 보는데, 학교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어딜가나 사람, 사람, 사람. 아 정말 역대급 힘든 한 주를 보낸 나에게 수고했다고 토닥여주었다.
밥을 꼬박꼬박 잘 먹을 수 있다는 건 마음이 꽤나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온전히 한 끼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건 소소한 행복을 넘어선 중요한 행복이다. 삼시세끼를 다 먹은 날이 없던 주가 있었다. 고기를 먹으면 바로 체하고 몇 시간동안 속이 아팠다. 점심에 고기 몇 점을 맛있게 먹으면 저녁을 먹지 않고 과일주스만 먹었는데도 계속 속이 안 좋았다. 점심 이후로 먹은 게 없으니 배는 고프고 먹고 싶은 것들이 머리속에서 계속 생각나기 마련이다. 점심을 먹고 나니 배거 계속 사르르 아픈 날도 있었다. 정말 스트레스와 이 학교가 원인인가. 속이 안 좋기도 했고 공부할 것도 많고 겸사겸사 안 먹었다. 하루 점심을 안 먹고 열람실에 바로 내려갔는데, 밥을 먹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 우리 기숙사생들이 많았다. 짠하고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는데 모두가 각자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듯해지면서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힘이 차올랐다. 한끼 식사보다 더 알찬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지 않고 야자를 하니 힘도 없고 지치는데. 야자 시작과 동시에 책을 펴고 공부를 하다가, 우리반 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다들 미소천사다. 저절로 힘이 나서 공부하게 되는 것 같다. 스트레칭도 하고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라 너무 좋았다. 혹여나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봐 사물 문도 살포시 닫아주는 센스까지 직은 배려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복도에서는 그렇게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반만 들어오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졌다. 가고 싶고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자기전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멋있어보였다는 게 이유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반장’ 소리만 여러 번 들은 하루였는데. 특별히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거나 애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면 나를 종종 그렇게 불렀다. 1학기도 거의 막바지를 향해 갈 때 쯤, 처음에는 어색하고 친해질 생각 없던 애들까지 편하게 얘기하고 놀 수 있어서 행복했다. 우리반 애들이 제일 착하고, 그래서 소중했다. 더 잘해줘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내신이 끝난 날(3학년 1학기까지만 내신이 반영된다) 쪽지를 한 명 한 명 써서 과자와 함께 나눠줬더니 너무 좋아했다. 다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거의 하루종일 풀 자습이어서 공부에 지쳐있을 때, 우리반 애들과 수다 타임을 가졌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20분 쉬는시간에 실컷 웃으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저녁 먹으러 집에 가다가 뱀 만난 썰, 등등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진짜 힘없고 피곤했는데, 그래도 공부가 되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야자 2교시에는 부반장이 배고프다는 이슈로 이런저런 애기를 속삭이며 했는데, 잠깐이었지만 너무 재밌었다. 서로 눈만 보면 재밌어서 그렇게 해맑게 웃었다. 인덱스 하나 빌려주는 것 가지고도 그렇게 재밌다고 얘기했다. 쟤 이상하다고, 우리번에 정상 없다고 말이다.
되게 깔끔한 것 같은 공부 잘하는 남자애가 있었다. 수능완성을 받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바닥에서 치우지를 않길래 얘는 사물함에 자리가 없나, 하면서 사물함을 열어봤는데 사물함이 널널했다. 그냥 못 본 척하고 그대로 바닥에 뒀다. 그날 부반장이 인덱스를 빌리러 나에게 오다가 그 수능완성 책 더미에 쌓여 넘어질뻔 했다. 주변은 웃음바다였고, 결국 그는 모의고사 날 치웠다. 사소한 것에도 재밌다고 그렇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