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앞두고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신 말이다. 인생의 지혜가 담긴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되새기며 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루는 저녁을 안 먹고 열람실에 내려갔는데, 후배가 공부하고 있었다. 그 후배는 조금 늦게 공부를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내가 스탠딩에 서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조금 많이 놀란 듯해 보였는데, J는 자투리시간을 아주 활용을 잘하는 것 같다. 자신만 인정하지 않는 효율 갑인 친구다. 나는 좀 시간이 있어야 여유롭게 집중하고 하나의 할 일을 끝나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날도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하나의 임무를 잘 끝내서 후련했다. 이런 기분은 내가 이 고등학교를 왔으니까 느낄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모두가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학교라 나도 더 꾸준히 힘을 얻어 할 수 있는 것 같다.
적고 보니 저녁을 안 먹은 날이 굉장히 많은데, 그만큼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그랬다. 저녁시간에 열람실까지 내려가기는 힘들어서 교실에서 지구과학 모의고사 풀이를 듣다가 좀 걸어야겠다,하고 복도 나갔는데 후배 J가 걸어왔다. 식사 안하시냐고 말했다. 자기 최애 선생님이랑 상담해서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J가 행복하니 나도 에너지가 차올랐다.
J는 내가 애정하는 1살 차이 후배이다. J의 1학년 1학기 열람실 자리가 바로 내 옆 자리였다. 선배들에게 내가 받았던 것처럼 J에게도 잘해주고 싶었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고, 내가 아는 선에서 알려주고 싶었다. 시험기간이나 모의고사 때마다 서로 응원을 해주며 지냈고, 자리가 떨어져서도 그 관계를 유지했다. 그만큼 J가 신경이 쓰였나보다. 한 학기동안 옆자리에서 생활하면서 배울 점도 많았다. J는 야자시간에 한 번도 졸지 않았다. 그게 너무 신기했고, 당연히 내신도 높고 모의고사도 상위권이었다. 내가 잘 알려준 덕분이라고 하지만 결국 스스로 잘 공부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팁을 알려주면 바로 수행하는 능력이 정말 대단했다. 그러니 계속 뭐라도 더 알려주고 챙겨주고 싶었다.
그렇게 점점 우리는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
‘J야. 이건 아이슬란드를 담은 엽서야.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도, 힘들면 잠시 고개를 돌려 펼쳐진 드넓은 풍경을 보며 호흡하는 말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있는 힘껏 소리 없이 변화하는 산처럼, 순간과 그 순간에 존재하는 너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새로 나온 말차 빼빼로와 함께 엽서를 적어서 저녁 시간에 후배 책상 위에 올려뒀다. 내가 밤에 세수하고 올라오는데 계단에서 마주쳤다. 빼빼로가 문제가 아니라 엽서가 너무 예쁘고 문장이 하나하나 너무 감동적이었다며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고 했다. F냐고 물어봤는데 자기 완전 대문자T라고, 글을 왜 이렇게 잘쓰냐고 했다. 너무 귀여웠고, 매력있는 친구다. 밝은 J덕분에 나도 에너지를 많이 받고 더 좋은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타임캡슐을 뜯었다. 그러니까 내가 1학년, 2023 7. 21에 썼던 편지를 파묻었었는데 그걸 2년 뒤에 열어서 편지를 읽어보았다. 3학년 이때쯤 읽을 걸 생각하고 2년 전 내가 썼다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했고 감정이 북받쳤다. 누군가가 내 편지를 받고 감동 받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어리고 풋풋했다, 그동안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 느낌보다는 그때 내가 많이 의젓하고 세상의 이치를 다 겪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다 아우르고 포용할 수 있고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고작 그 편지 하나가 수능을 93일 앞둔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힘은 강력했고. 부장선생님의 아이디어 또한 좋았다. 2년 전에 썼던 기억이 정말 흐릿하게 어렴풋이 났었는데, 이런 내용을 한 페이지 꽉 채워 쓴 2년전의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 2년동안 별에 별 일을 다 겪고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동안 상처받고 쓸리고 쏠린 마음이 그때 내가 무심하게 쓴, 내용도 다 기억하지 못할만큼 무심하게 쓰고 잊은 그 문장들이 치유해주고 보듬어주었다.
1학년 때는 1학년대로 재밌었다. 학교가 재밌는 공간임을 느끼고, 방학 때 애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억울하고 힘들어서 울부짖었던 날들도 그때의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2학년 때는 1학년 때보다 더 자주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내신에 지쳐서 잠시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기숙사 방에서 나의 소울메이트를 만나서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고 행복이 뭐 별거냐며, 건강이 제일 중요하기는 얘기도 했다. 말이 안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기가 다 빨려서 누워있으면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들어주는 내 정신적 지주에게 살포시 기대기도 했다. 다 내 곁에 있어준 친구들 덕분이다.
우리반 애들은 다들 정신줄을 놓고 사는건지도 모르겠다. 야자 전 쉬는시간인 저녁시간부터 교실에는 과자 냄새가 진동했다. 그걸 야무지게 봉지채 세워두고 나무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먹는데, 다른 한명은 컴퓨터 책상 바로 옆 바닥에 앉는다. 남자애는 복도를 나갔다 들어왔다 하더니 그 근방에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는다. 저기는 바닥에 노트북을 책상에 두고 말이다. 그를 본 우리 스윗한 부반장은 사물함에 가서 방석을 꺼내더니 깔고 앉으라고 갖다주었다. 날도 여름이라 이제 야자 시간에도 밝고, 교실은 에어컨을 틀어 냉장고지만 마음만은 따스했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자니 너무 웃겼다. 우리는 쉬는시간만 되면 어디에서 가져온 건지 자기들도 모르는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휴식을 취한다. 야자시간에도 대놓고 깔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정말 행복 풀충전 타임을 가지기도 했다.
야자 1교시 중에 내가 재채기를 했다. 그렇게 추운건 아니었고, 재채기 하고 나서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내 옆에 앉아있던 H가 갑자기 일어났다. 설마설마 했는데 에어컨 조절하는 벽으로 가서 온도를 높이고 차가운 공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창문도 한켠을 열어준다. 그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앉아서 공부했다. 너무너무 쏘 스윗했다. 감동이었다.
어떤 날은 점심시간에 조용한 우리 반에서 허리가 너무 아파 스탠딩 책상에 서서 지구과학을 풀고 있었는데 뒷문이 열리면서 말소리가 들렸다.
“오 파이팅! 반장 또 밥 안먹었지? 뭐 한끼 정도는 걸러도 괜찮지. 아침은 먹잖아?”
약간 여동생 대하듯이 하는 오빠미가 묻어났다. 서로 걱정하고 챙겨주면서 나아가는 우리반이라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