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주인공 ‘아가씨’가 이런 대사를 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이 대사만큼 나의 조울병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조울병 때문에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했다. 학교도 겨우 마쳐, 커리어를 쌓을 겨를도 없이 무너져, 사람들도 못 만나고 집에만 처박혀있어, 아프기까지 해…….
발병 초기에는 약효가 들 때까지 기간이 있으니 약을 먹어도 낫질 않고 부작용에 힘겨워하며 ‘내가 정말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암담해졌기도 했다.
조울병은 뜨고 가라앉는 것이 분명한 병이다. 그래서 난 이 병을 받아들이고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조증이 강할수록 울증도 강하다. 반대로 보자면 울증이 강할수록 조증도 강해진다.
조증일 때 주로 영감 inspiration이 온다. 나는 그걸 ‘영감탱 오신다.’라고 표현한다. 경조증일 때 영감님은 ‘틀니’나 ‘지팡이’ 정도만 휙 던져주고 가버린다면 조증이 심화되면 직접 ‘오신다.’ 그럼 그때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충분히 한다.
글을 쓰고 예술을 향유한다. 사람들을 만나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하고 주고받고, 취미 생활을 즐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민감하게 돋아진 나의 감각으로 그 맛과 향을 음미한다.
울증이 되면 조증 때 소모하여 방전된 몸과 마음을 쉬면서 회복한다. 회복이 되면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다. 울증을 일종의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울증일 땐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이 들지만 극단적으로 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도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그렇게 조울의 너울을 지난다.
이렇게 내가 나의 에너지를 운용하기 까지는 수많은 실패와 눈물과 고민, 그리고 고통의 길이 있었다.
과거의 나는 조울증이 나쁘고 꼭 고쳐야만 하는데 고쳐질 수 없는 병이라고 낙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생 약 먹고 조절하고 내가 컨트롤해야 하는 지병으로 인식한다.
조증은 내 20대를 망쳐놨지만, 그만큼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30대를 막 돌입한 나의 삶은 망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삶 역시 병이 나를 망치도록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렵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뜨고 가라앉음이 급격할수록 정신과 신체는 산산이 부서진다.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조증일 때는 너무 행복하지만 그 기저엔 불안감이 깔려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란 불안부터, ‘이렇게 들떴으니 우울도 깊겠구나. 내가 견딜 수 있을까?’하는 불안, 그리고 이유 없는 불안까지.
그래도 다행인 건 울증과 조증이 번갈아 나타나니 감사함을 더 깊게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이 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충전할 시간이 돌아왔어.’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