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오감으로 기록된다

by 진이령

최근 이이언이 신곡 ‘그러지 마’를 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다 보니 이별했을 때의 헛헛함과 쓸쓸함이 떠오른다. 서로의 타이밍이 어긋나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홀로 남겨질 때의 아픔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피어오른다.


어느 늦여름 밤이었다. 지금도 그 날을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시리다. 7월의 어느 날 밤을 춥게 기억하는 건, 돌아선 그의 등에서 느껴졌던 한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하염없이 그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던 밤이었다. 나는 약간은 쌀쌀한 밤공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홀로 청계천을 걸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모른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한 녹음 파일이 셔플로 돌던 플레이 리스트에서 예기치 않게 흘러나올 때의 나의 마음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가 가쁘게 두근거리는 그 간질거리는 마음을 그는 몰랐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떠났겠지. 좋아하는 노래 사이에 깜짝 선물처럼 흘러나온 5초의 짧은 음성 녹음 파일은 나를 전율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날따라 그 음성은 더욱 애틋하게 마음에 남았다. 귓가에 속삭이듯 들리는 5초 분량의 따듯한 목소리가 왠지 차갑게 느껴질 때쯤, 한참을 답이 없던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종각에서 잠깐 봐.

짧은 카톡 메시지에서 나는 이미 이별을 읽었다. 눈물이 왈칵 나려는 것을 참고 종각을 향해 걸었다. 안개 낀 하늘에 희미하게 비치는 한줄기 달빛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 종각에 도착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헤어지자.

지면을 데우던 더운 공기가 가라앉고 찬바람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나의 발걸음은 더운 공기에 묶여 그에게로 한 걸음도 더 내딛을 수 없었다. 자리에 굳어버려 서있는 나는 눈물을 흘리지도 손을 뻗어 그를 붙잡지도 못했다. 그저 굳어있었다.


청계천을 거슬러 종각까지 오면서 그가 뱉어낼 네 글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헤어지자는 그의 말에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울대까지 올라온 말은 입에서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속이 녹아내렸다. 바짝바짝 마르고 서늘해졌다. 갈기갈기 찢겨 너덜너덜해진 마음 조각은 한데 엉켜 넝마보다 못한 꼴이 됐다. 내 마음의 소리를 그가 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 그 날카로움에 고막이 찢어졌을 것이다. 쿵쿵 무겁게 짓이겨지던 나의 마음을 그는 몰랐겠지.


그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진짜 그가 나를 사랑했을까?


아직도 눈에 선하다. 피곤에 지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겨운 듯 말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아 애꿎은 손만 바라보며 꼼지락거렸다. 알겠다는 내 마지막 한 마디에 지체 없이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계속 눈앞에 펼쳐졌다. 아주 잠깐, 품에 안고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부질없는 짓임을 알기에 바로 마음을 접었었다. 그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걸 나는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찰나 같던 시간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깊은 상흔으로 남아 나를 울렸다. 그가 쓰는 샴푸로 머릴 감고, 그가 쓰는 바디 워시로 샤워를 하고 그가 뿌린 조 말론과 페라리 라이트로 나를 적셨던 그 시간들. 그의 향기와 공유했던 감정이 오감을 자극하며 피어오른다. 그의 향수를 뿌리고 출근했던 날, 나는 하루 종일 그에게 안겨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행복했었다. 들숨과 날숨에서 그의 체향이 느껴지고, 익숙한 그의 향기가 나에게 녹아 발려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 몸이 달아올랐었다.


그는 나에게 아픈 향기로 남아 비슷한 향이 풍겨오면 통증으로 되살아난다. 그날 밤같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비슷한 향수 향이 나면, 그리고 그를 떠오르게 하는 노래를 들으면, 가끔 그가 내뿜던 한기를 기억한다.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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