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임윤찬

2025년이라는 1악장을 끝내고

by 이예진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연주. ⓒ youtube

악장의 숨결에 대해 생각한다. 종지의 이후에는 단순한 ‘쾌’가 남기도, 혹은 ‘여운’이 남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음악 역시 흐르고 있다. 그런데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멈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설계를 해내는 것이 작곡가의 몫이다. 바야흐로 1월. 시간은 본래 영속적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끝과 시작이 있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한다. 2025년이라는 1악장을 끝내고, 2026년이라는 2악장으로 진입하는 이 시점에, 나는 작년에 발매된 클래식 앨범인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꺼내든다.


이 작품은 시간의 누적을 음악적으로 증명한다. 라흐마니노프답게 곡은 멈추지 않은 채 흘러간다. 음은 겹치고 밀려들며 쉽게 풀리지 않은 채 축적된다. 쉼표조차 휴식이 아니라 다음 압력을 준비하는 구간처럼 기능한다. 라흐마니노프는 주제, 화성, 리듬의 패턴을 조금씩 두텁게 축조하며 감정을 해소하기보다 눌러 담는다. 클라이맥스 역시 서두르지 않는다. 그 결과 체감하는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정체에 가깝게 느껴진다. 양손 묵직한 여덟음의 코드 사이를 16분 음표로 쪼개진 소리 조각들이 메우고, 그 두 가지 레이어를 열 손가락으로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이 곡은 콩쿠르에서 연주자의 옥석을 가리는 단골 리트머스가 된다. 이 곡이 어떤 매체들에 쓰이기 보다 ‘평가를 위한 곡’, ‘콩쿠르’에 쓰이는 것은 클래식 문화에서 대곡으로서의 위상과 함께, 반복 소비되는 레퍼토리로서의 대중성도 획득한다. 임윤찬의 연주 역시 반 클라이번(Van Cliburn)이라는 세계 3대 콩쿠르 무대에서 이뤄진 실황이라는 점에서 그 결을 같이 한다. 클래식에는 이런 무대가 오히려 일종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긴 러닝타임과 밀도 높은 구조를 자기만의 해석으로 통과해내는, 임윤찬이라는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는 드라마. 이러한 배경과 라흐가 지닌 특유의 극적이고 낭만적인 색채가 그런 뭉클함을 더 한다. 실제로 그런 순간이 이 앨범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Yunchan Lim 임윤찬 –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c) youtube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이지만 체감상 오케스트라만큼이나 피아노가 분주하다. 오죽하면 발렌티나 리시차가 피아노의 95%는 오케스트라에게 잡아먹힌다고 말했을 정도다. 초반 도입부의 주제 이후 피아노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지점은 1악장의 카덴차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의 카덴차는 두 가지 버전의 악보로 연주자에게 선택지를 제공한다. 빠르고 가볍게 지나가는 오리지널 버전, 그리고 무겁게 두터운 화음으로 축조된 ossia 버전. 피아니스트는 스승과 함께 이 갈림길에서 진지한 판단을 요구받는다. 임윤찬은 전자를 택했다.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ossia 버전을 들어보면 질감의 변화로 인해 곡의 밀도가 일순간 높아진다. 파괴적이기도 하다. 이는 섬세함보다 두터운 텍스쳐를 밀어붙이는 해석으로, 청자에게도 강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코드 중심으로 수직적으로 내려치는 구성은 멈춰 선 오케스트라와 함께 어느 한 구간 안에 갇힌 듯한 ‘정지’의 느낌을 자아낸다. 반면 임윤찬은 오리지널 카덴차를 선택함으로써 선율 중심의 긴장을 유지하고 흐름을 지속한다. 시간을 끊지 않겠다는 판단이다. 그 결과 연주는 묵직한 악마성을 띠기보다 섬세하고 자연적인 소리가 스스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방향으로 기운다. 마치 유리알처럼 굴러나온 듯한 형상으로.


2악장을 지나 3악장에 이르면 곡은 피날레의 환희로 치닫는다. 1악장 초반의 음울하고 무거운 선율은 분절되고 주제는 튀어오르는 리듬감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피콜로와 플룻, 목관의 지저귐은 마치 프로코피예프를 연상시키듯 산뜻하고 동화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반적인 컬러는 d minor인 1악장의 조성을 유지하며 궤를 같이 한다. 색채와 텍스쳐에 변주를 주었을 뿐, 주제로의 회귀는 전면적으로 이루어진다. 기나긴 러닝타임 끝에 다시 조우하는 이 주제는 앞선 굴곡을 통과한 뒤에야 도달하는 극적인 감정으로 작용한다. 타악기의 등장과 함께 중저음역대에서 묵직하게 움직이는 피아노, 8분음표 위를 이따금씩 가로지르는 셋잇단 음표가 긴장을 증폭시키고 급격한 리듬의 변화 속에서 오케스트라는 함께 폭발한다. 이후 주제를 짤막하게 마지막으로 재현하며 곡은 끝을 맺는다.


1월, 또 다시 1월. 마치 주제의 회귀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이 유명한 선율은 현재까지도 사랑받으며 끊임없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정점에 있는 감정을 지연한 끝에 정확히 도달하게 만드는 선율이다. 한 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듯 음악 역시 끝을 향한 인내를 요한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언제나 보상된다. 오케스트라의 한층 더 두터워진 텍스쳐와 함께 재현되는 주제는 항해의 끝과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암시한다. 임윤찬의 이 실황 앨범은 바로 그 '끝과 시작이 겹치는 지점'에서 완결의 뭉클함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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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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