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KMA 노미네이트로 읽는 2025년의 음악
월간 진지 | 2026 한국대중음악상 특집
에피(Effie)의 커리어가 얼마나 무계획적으로 시작됐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학교를 자퇴하고, 미디 학원에서 미디를 배우고, 사운드클라우드에 트랙을 올렸다. 알려주는 선배도, 매니저도 없었다. 공연에 VJ 영상을 틀어야 하는지, 오토튠 기어를 들고 가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무대에서 기죽는 공연을 2년간 반복했다. "무대를 즐길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사람이 에피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작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게 방법론이 되어 있었다.
2023년 말, 전세계 하이퍼팝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이 모인 도쿄 공연. 에피는 거기서 처음으로 다른 아티스트들이 무대를 어떻게 만드는지 봤다. 유튜브로 오토튠 기어를 독학해서 들고 갔다. 그리고 스위치가 켜지듯, 무대가 재밌어졌다. 그 감각이 음악으로 번졌다. 가벼워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가장 밀도 높은 음악 – 하이퍼팝 - 을 만들게 됐다.
영미권에 그래미가 있다면, 국내에는 한국대중음악상이 있다. 매해 2월, 노미네이트 명단을 훑어보는 일은 한 해의 음악을 되짚는 일과 닮아 있다. 어떤 이름이 반복되고, 어떤 장르가 확장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해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2026 KMA 최다 노미네이트 아티스트는 에피다. EP와 정규 앨범으로 여섯 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뉴진스가 2023년 6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를 기록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숫자의 무게가 다르게 읽힌다. 에피는 대형 소속사도, K팝 시스템도 없이 그 자리에 도달했다. 사운드클라우드에 트랙을 올리고, 뮤직비디오를 직접 찍고 편집하고, 공연 장비를 유튜브로 독학한 아티스트가.
뉴욕타임스의 음악비평가 존 카라마니카(Jon Caramanica)는 2025년 최고의 앨범으로 에피의 EP <Pullup to Busan 4 More Hyper Summer It's Gonna Be a Fuckin Movie>를 선정하며 이를 두고 "deeply logical eruption"이라 표현했다. 논리적으로 축적된 폭발이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에피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하이퍼팝은 원래 그런 음악이다. 아이디어가 폭주하고, 급격히 전개되고, 의도적으로 편집이 깨진다. 장르적 충돌 자체가 방법론이다. 트랩 드럼 위에 유로댄스 신스가 얹히고, 메탈 기타가 갑자기 진입하며, 보컬은 오토튠과 피치 시프팅으로 의도적으로 기계처럼 조작된다. 인터넷에서 자란, 밈처럼 소비되는 감정, 틱톡 단위로 잘린 시간 같은 조각. 하이퍼팝은 그 모든 것을 음악으로 직조한 장르다.
에피가 다른 것은, 이 충돌을 설계 안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의 음악은 대체로 벌스–프리코러스–드롭/훅–브리지–재귀환이라는 흐름을 따른다. K팝을 소비하며 자란 세대가 무의식적으로 체화한 구조다. 폭발은 유지하되, 청취자가 돌아올 지점을 분명히 둔다. 혼란이 설계로 감싸인다.
에피의 드롭은 폭발이 아니라 개방이다. 'Put My Hoodie On'은 처음에 별것 없이 시작한다. 스냅 소리와 함께 킴제이(kimj)의 베이스가 낮게 깔리고, 에피의 목소리가 그 위에 얇게 얹힌다. 그러다 30초쯤, 뭔가 쌓이기 시작한다. 신스가 들어오고, 보컬이 레이어드되고, 고음역이 조금씩 치고 올라온다. 그리고 드롭. 터지는 게 아니라, 소리를 한 번 비운 다음 공간째로 확장하는 느낌이다.
이것이 하이퍼팝의 문법을 에피가 재조립하는 방식이다. 과잉을 채우는 게 아니라, 과잉을 설계 안에서 한 번 비워내는 것. 충돌은 유지하되, 그 충돌이 어디서 터질지를 에피는 알고 있다.
에피의 보컬은 인공적이다. 오토튠, 피치 시프팅, 젠더 플루이드한 변형. 그런데 이상하게도, 감정이 들린다.
일반적으로 하이퍼팝의 보컬 처리는 캐릭터나 아이러니에 가깝다. 기계처럼 만든다는 것은 거리를 두는 행위이기도 하다. 에피는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인공성을 유지하면서도 멜로디 선율과 가사 전달을 또렷하게 살려, 감정의 축이 무너지지 않게 한다. '가짜 같은 소리'인데 감정은 진짜처럼 들리는 구조. AI 시대, 디지털 왜곡이 일상이 된 시대에 이 역설은 시대를 관통한다.
그래서 에피의 음악은 '인터넷 감정'의 가장 정직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과장되고, 빠르고, 단편적이지만 그 안에 감정의 온도가 있다.
해외 매체는 에피를 K팝과 연결 짓는다. 급격한 전개, 드롭 중심, 장르 혼합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는 K팝 시스템의 바깥에 있다. 아이돌 산업이 아니라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시작했고, 소속사가 아니라 인터넷 피드백 루프를 통해 성장했다.
그가 K팝으로부터 가져온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문법이다. f(x)의 'Electric Shock', GD&TOP의 '집에 가지 마', 뉴진스의 'Super Shy'. 가사를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멜로디와 훅의 진행 방식 자체를 흡수한다. 그리고 그 위에 하이퍼팝의 왜곡과 과잉을 얹는다. K-가 없어도 Effie가 있는 음악이다.
<E>에 수록된 ‘kancho’에서 "태극기 한국인"이라는 가사를 뱉고, 뮤직비디오에 지하철 역사와 한강공원을 쏟아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K팝을 참조하되 그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으면서,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다시 쓴다.
에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친구들과 놀 때도 '논다'는 게 뭔지 자문할 만큼. 그런 사람이 하이퍼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실천이다. 가벼워지기 위해, 단순해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온 시간들이 음악에 스며 있다.
정규 앨범 <E>의 'Put My Hoodie On', EP <Pullup to Busan 4 More Hyper Summer It's Gonna Be a Fuckin Movie>의 '막걸리 뱅어'. 엄청 신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것이 들어있는 트랙들. 이 곡들이 그냥 파티 음악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이퍼팝이라는 장르는 낙관적으로 보이지만 그 표피 아래 이모(emo)한 감정을 품고 있다. 에피의 음악은 그 이중성을 가장 성실하게 구현한다.
PC뮤직에서 시작해 이어진 하이퍼팝이라는 조류가 임계점에 달한 2025년. 그 끝에서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환영받는 소리로 자리매김한 것은 다름 아닌 에피였다.
인터넷에서 감정은 표현되지 않는다. 선택된다. 밈 하나, 이모지 하나로 압축되어 던져지고, 그게 내 감정이 된다. 하이퍼팝은 그 간극이 쌓여서 터진 소리다. 에피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묻는다면, 아마 그 반대편에서 온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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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멜론 캐스트 <트랙제로> (155화. 게스트 초대석: Effie / 20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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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projectjinj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