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의 고백과 이별, Like a Movie #5
2년 만에 전화, 묵직한 목소리는 여전했고 말투도 그대로였다.
"내일 저녁, 밥 먹자. 할 말이 있어. 구로공단역 어때?"
딱히 만날 이유도 없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사실 2년 만에 연락해 온 그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2년 전과는 별반 다를 것 없는 나의 동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럽시다. 몇 시?"
저녁 일곱 시 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내심 기대도 되었다. 아직도 날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하면 어쩌지? 설마 그럴 리가! 그게 아니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다시 만나자고 하면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야 하나? 또 상관없다고 하면 어쩌지? 괜히 만나기로 했나? 하룻밤 사이 몇 번이고 소설을 썼다 지우며 잠을 설쳤다.
오랜만에 만나니 예의상 곱게 보여야 할 것 같아 평소보다 옷도, 화장도 신경 썼다. 난 예의 바른 여자니까! 헤어졌던 사람을 오랜만에 보는 일은 왠지 설렌다. 나만 그런가? 상대의 변한 모습도 궁금하고 지난 시간 속의 내가 그립기도 해서 마음 한구석이 몽글댄다.
두근두근, 그를 만났다. 예전보다 야윈 듯했지만 큰 키 덕분에 한눈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그가 싱긋 웃었다.
"왔어? 가자."
마치 어제 만났다가 오늘 만나는 것처럼 짧은 인사다. 군더더기가 없다. 오랜만이라든가, 더 예뻐졌다든가, 혹은 살이 빠졌다든가 입에 발린 소리는커녕 안부조차도 묻지 않는다. 손목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어간다. 역시 그다. 기억 너머 어디 즈음으로 잊혀졌던 말씨, 행동이 한꺼번에 밀려와 실없이 웃음이 났다. 큰 키 덕분에 보폭이 큰 그와 손을 잡고 걸을라치면 나는 거의 뛰는 수준이 되어야 했던 옛날을 복기하고 있었다.
"저기요... 좀 천천히 걸어요. 나 숨차."
그가 피식 웃는다.
"놓으랄까봐 걱정했더니 그 말은 안 하네. 그럼 됐다."
그는 발걸음을 늦추고 나를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짧은 인사와 빠른 걸음, 그는 긴장했었나 보다.
"뭐가 됐어요? 여전하네. 손목 좀 놔요."
"다 왔어. 놓지 말래도 놓는다."
삼겹살 집 앞이다. 그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허세를 떨지도 않았다. 비싼 꽃등심은 먹어도 스테이크를 썰었던 기억은 없고, 활어횟집에서는 곧 죽어도 자연산을 주문하면서도 번듯한 일식집의 마구로는 절대 이해 못하는 사람이었다. 맛있는 것은 좋아해도 지나친 격식을 차려야 하는 곳은 태생적으로 부담스러워한달까? 2년 만에 헤어졌던 여자에게 만나자고 해놓고 삼겹살 집으로 데리고 가는 남자. 자꾸 웃음이 났다. 그래 사람 버릇 어디 가나.
"왜 웃어?"
"아니 그냥."
삼겹살 집 안으로 들어서니 이런 심지어 좌식이다. 바지를 입긴 했지만 신발을 벗어야 한다. 아 이 남자, 연애를 안 해본 티가 나도 너무 난다. 신발을 벗기 난감해 인상을 쓰고 서있었다.
"왜? 이 집 삼겹살 맛있어."
그러더니 나를 달랑 들어 앉혀놓고 신발을 벗긴다.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예전 아니 다른 남자였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그의 여전함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게다가 나를 이렇게 달랑 들 수 있는 남자가 또 있겠는가.
"하하하하하"
".... 왜 웃어?"
갑작스러운 내 웃음 폭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와 진짜 오빠는 여전하네요. 어쩜 이래. 그동안 연애 안 했어요?"
"어 안 했다. 너 놔두고 누구랑 연애를 해"
이번엔 내가 당황, 웃음이 뚝 그쳐버리고 말았다. 우두커니 제과점 앞에 서있다가 사라져 2년 만에 연락하고 만나면서, 너 놔두고 누구랑 연애를 하냐니. 이 사람의 나를 당황시키는 능력도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색해져 버린 나를 끌어 자리에 앉히고 오겹살을 주문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어색한 분위기를 밀어내려 말을 건넸다.
"잘 지냈지. 김포공항 옆에 가게 열었어."
"와~ 이 사장님?"
그리고는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떠나던 그때, 서울을 비운 사이 그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서 자랐기에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큰 상처로 남았다. 할머니의 장례 이후 그는 조직에서 완전히 나왔다. 손가락이 잘렸냐고? 아니 그의 손가락은 모두 멀쩡했다. 조직을 나오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다만 뭔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 정도만 말했다. 그 이후 케이크가 맛있다는 집만 찾아다니며 한 일 년 정도 케이크를 배웠단다. 그리고 일 년 전 김포 공항 근처에 웨딩케이크 전문점을 냈다고 했다. 김포공항에 있는 예식장과 계약이 성사되어 주말이면 수십 개의 웨딩케이크를 납품하게 되면서 그의 제과점은 자리를 잡았다. 저 크고 투박한 손으로 섬세하고 예쁜 웨딩케이크를 만들다니 상상이 되지 않지만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니 듣는 내내 대견하기까지 하더라.
"부모님 집에서 나와 제과점 근처에 집도 마련했다. 나는 준비 끝났어. 너만 오면 돼. 결혼하자"
"네?"
"지난 2년 간 죽도록 달렸다. 네 앞에 조직폭력배가 아니라 제대로 된 남자로 돌아오고 싶었으니까."
세상에! 2년 간 기억에서 지워져 갔던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며 뭔가 이뤄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늘 답은 같다. 그저 진심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2년 동안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살다가 불쑥 나타나 결혼하자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삶을 바꾸는 동안 나도 바뀌었어요. 미안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 만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2년 이란 시간이 짧지 않다는 것도 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는지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 모르지만 나보다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있을까? 헤어져라. "
참 쉽다. 헤어지라니. 순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자기가 한 말은 해내는 사람이고,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할 만한 구석도 있는 사람이다. 무뚝뚝하지만 내가 원하면 뭐든,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한 번은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다정하진 않지만 속은 깊었고, 방식은 거칠었지만 적어도 나에게 폭력적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또래의 여자들이 고민하는 상대의 경제적인 부분까지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를 아는 여자로서 매력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 나는 그때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오빠 때문에 헤어질 만큼 가벼운 사이 아니에요. 오랜만에 연락받고 반가웠고, 궁금했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다시 만나보자가 제 상상의 최대치였는데 오빠는 역시 상상을 뛰어넘네요."
그는 소주를 들이켰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결혼할 거니?"
"누구와도 지금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나도 당장 결혼하자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와 다시 만난다면 그 끝은 결혼이어야 해."
"오빠랑 다시 만날 생각도, 지금 만나는 사람과 헤어질 생각도 없어요. 그리고 결혼은 아직 제겐 먼 이야기고요."
"지금 만나는 사람이랑 헤어지고 나에게 올 시간 줄게, 2주. 더 이상은 못 기다린다."
"제가 말했잖아요. 헤어질 생각 없다니까. 오빠는 나에게 그저 지난 시간 속에 반가운 사람일 뿐이에요."
"생각해보고 답해. 지금 당장 이러지 말고."
"생각해봐도 내 답은 같아요."
"그래 나도 2주는 못 기다리겠다. 오래 생각한다고 답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테니 헤어질 수 있는지 아닌지만 생각해서 2일 안에 이야기해라.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자."
그는 확고했다. 그동안 달려온 길의 이유가 바로 나였으니, 쉽게 놓을 수 없었을게다. 그렇다고 내가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출 순 없었다.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이 아닌가.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을 텐데 너무 가볍게 생각한 나의 잘못이었다.
"전 생각할 게 없어요. 이만 일어날게요. 친구 만나듯 가볍게 생각하고 나왔는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직진했다. 이런 만남에 밥을 얻어먹을 순 없었으니까. 계산을 하려는 내 손을 밀어내고 돈을 주인아주머니에게 쥐어줬다.
"아뇨 내가 살게요. 내가 사고 싶어요."
"니가 나만큼 벌 때 그때 내라. 아주머니 잔돈은 됐어요."
먼저 일어났는데 그에게 떠밀리듯 식당을 나왔다. 역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뒤를 그가 따라왔다. 어차피 그도 2호선을 타야 되는 상황이라 딱히 나를 따라온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역 안으로 들어가 신도림 방향으로 걸어내려 갔다. 역시 그도 같은 방향. 둘은 말이 없었다.
지하철이 오고 같은 지하철을 탔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는데 감정의 저 한 편에는 애잔하고 짠한 마음이 기웃댔다. 나를 생격하며 2년을 살아온 사람에게 한 없이 모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앞만 응시하고 있는 내 손을 그가 꽉 움켜쥐었다.
"사랑했다. 많이."
심장이 쿵 떨어졌다. 2년 전에도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몸이 얼어붙은 사이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전화 기다릴게. 만약 2일이 지나도 전화가 안 오면 깨끗이 포기할게."
"기다리지 말아요."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내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지하철이 서고 둘 다 내렸다. 그는 몇 정거장을 더 가서 갈아타야 했지만 나와 함께 내렸다. 손을 놓으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 그의 얼굴을 봤다. 슬픈 눈, 2년 전 제과점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그때의 눈빛이었다.
"그래도 기다릴게. 2년도 기다렸는데 2일을 못 기다리겠어"
"......"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
그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잡았던 손을 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내 얼굴을 정면으로 한 번 더 내려다보더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나를 현실로 끌어당긴 건! 엄마였다.
"딸??"
"어!! 엄마."
"어머머 얘가 얘가, 난 설마 했더니 우리 딸 맞네. 누구니 누구야?"
"엄마! 빨랑 가 얼른."
엄마의 걸음을 재촉해 1호선 환승구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러나 엄마의 궁금증마저 빨리 몰아낼 순 없는 법!
"누구냐니까? 남자답게 생겼네. 도대체 키가 몇이니?!"
"아이참 별 사이 아니야. 키? 190."
"어머 얘 좀봐. 별 사이 아닌데 손잡고 뽀뽀해? 요즘 애들은 다 그러냐?"
"일방적인 상황이었다고. 내가 했어? 일방적으로 하고 사라졌잖아!"
"일방적인 상황이면 싸대기를 날려야지. 가만 있드만"
"아놔 못살아. 그 덩치를 내가 어떻게 때려. 손도 안 닿아! 그만해 그만해."
"에이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해봐. 누구야아~"
"엄마 기억나? 예전에 나 제과점에서 일할 때, 조폭 오빠."
엄마의 눈이 쟁반만 해졌다.
"어머어머! 걔가 쟤야? 생긴 거 멀쩡하구만! 남자답게 생겼지 험악하게는 안 보여."
그러고 보니 예전의 어두운 기운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가 지하철을 탔다. 그와 등을 돌려 엄마를 만나 수다를 떨면서 그의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그러네... 예전엔 같이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죄다 쳐다보고, 피하고 그랬는데 오늘은 안 그러더라. 조직에서 나왔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조직에서 나왔대?"
"응 나왔대. 지금 김포에서 웨딩케이크 전문점 오픈해서 잘 먹고 잘 사신대요."
"잘됐다 얘~ 과거야 뭐, 지금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그런데 쟤는 갑자기 왜 만났어."
"엄마, 결혼하재. 2년 동안 연락한 번 없다가 나타나서는 결혼하재. 기막히지?"
"뭐어~!?"
엄마에게 그날 들었던 이야기를 쭉 풀었다. 엄마와 거의 모든 연애사를 공유하는 나였기에 마치 친구처럼 그날의 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어머, 세상에를 연발하며 맞장구를 쳤다. 다 듣고 난 엄마의 표정이 짐짓 진지 해지나 싶더니,
"엄마는 말이야, 쟤 마음에 든다. 너 고생은 안 시키겠네."
"그래서? 나 결혼해?"
"결혼이야 뭐 천천히 한다고 해도 만나볼 만하네. 만나봐."
"엄마! 나 00 만나잖아. 알면서!"
"엄마가 보기엔 저 녀석이 백배 낫다."
"헐... 엄마 00이 이뻐하잖아. 너무 하는 거 아냐?"
"야~ 아무리 예쁜들 내 딸만큼이야 하겠어. 엄마한테는 내 딸 고생 안시킬 놈이 최고야. 딱 보니 남자답고 의지 있고, 그쪽 부모님들도 예전에 너 이뻐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됐지. 사람이야 더 만나보고 아니다 싶음 헤어지는 거지. 제대로 다시 시작해보지도 않고 밀어낼 건 또 뭐 있니?"
"하긴 그래? 그렇긴 하지?"
그의 남자다움과 박력, 의지에 홀딱 반한 엄마는 어느 사이 완전히 그의 편이 되어있었다. 엄마 기준에서 훤칠한 외모도 한 몫했고. 그러나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와 수다를 떨며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이틀이 지났다.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고, 그에게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 이후 난 그의 소식을 모른다. 지금까지.
가끔 조폭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검은색 정장의 키 큰 사내를 볼 때 그가 떠오르곤 한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흔들흔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역이 된 구로공단역을 지날 때 내 손을 꽉 움켜쥐었던,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가 생각난다. 그는 그렇게 내 인생에 조폭이 등장하는 로맨스(?) 영화 한 편을 선물해줬다. 해바라기 같기도 하고 약속도 생각나는 그런 영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