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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Sep 29. 2022

그렇게 떠났다

행복하면 충분해

평일 오전 마트는 전업주부들의 전유물 같다. 남편은 직장으로, 아이들은 학교로. 그제야 잠시 어깨 봇짐 내려놓는 주부들. 지금 이곳은 봇짐 장이 아낙들의 휴게소. 아낙들은 잠시 목을 축인 후 다음 채비를 한다.

무빙 워크에 올라서자 여기저기 웅성웅성 대화 소리가 들린다. 경희는 그만 피식 웃는다. 삶이 대동소이한 것 같아서.

오늘따라 유난히 느긋한 무빙워크에 잠시 삶을 관조하는 여유를 부리던 경희는 무빙워크 하차와 동시에 진열대 사이사이를 부지런히 누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간식거리와 찬거리수납장으로, 냉장고로 제 자리 찾아주고, 세탁기를 돌리고 잠시 엉덩이를 붙인다. 피로 회복을 돕는 진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한 20분. 띄운 얼음이 채 녹기도 전, 띠릭디릭띠릭.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몸을 폭 감싸 안는 소파의 포근함과 입 안에 퍼지는 아메리카노의 청량감에 신경세포들이 느슨해지려는 때, 뇌간에 쨍하는 파란이 인다. 벨이 울리면 손님의 방문, 띠릭디릭띠릭은 식구의 방문임을 무의식적으로 해독한다. 비밀 세계에 출입이 허락된 자의 위세를 부리는 위풍당당 띠릭디릭띠릭. 이어 연준의 소리가 들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경희는 분주해진다. 으랏차차~ 기합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힘을 모아 몸을 일으킨다.

 엄마, 엄마, ! 더워, 엄청 더워.” 연신 덥다는 소리를 토해내며 연지도 요란스레 들어온다.   

 오늘 하루는 어땠니? 학교에서 별 일은 없었고?”

 완전 좋았어. 재밌었어요. 오늘 선생님이 책거리한다고 과자파티해주셨거든! 꼬북이 진짜 맛있더라. 또 사주라, 엄마!”

 좋았겠다. 그런데 꼬북이는 네 용돈으로! 오케이? 경제관념 키우자고 용돈 주는데 말이야. 제 돈은 고이 모셔놓고 쓸 생각을 안 하시누만!” 쨍한 여름 햇살 같이 눈부신 연지가 귀여워서 일부러 한 마디 콕 쥐어박아 본다.

 치사해~~~

먹성 좋은 연지. 울다가도 먹을 것을 주면 풀리는 연지가 입술을 비죽거린다. 경희는 그런 연지 앞에 후다닥 만들어낸 샌드위치를 쓱 밀어 넣는다. 언제 비죽거렸냐는 듯 까불까불 해맑은 연지의 얼굴에 금세 햇살이 쨍이다. 소나기도 여우비처럼 내리는 투명한 연지가 내심 귀여워 경희는 작은 미소를 짓는다.

~ 나도 덩달아 좀 얻어먹으려 했더니...” 연준은 곁에서 살짝 너스레를 떤다.

, 아니다. 엄마가 경제활동에 대해 이해해 보자고 용돈을 주신 거고, 엄마 돈도 소중하니까 난 내 용돈으로 사 먹을 거야.”

연준이는 여느 때처럼 역시나 애어른 같은 소리를 한다. 


경희는 연준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딘지 마음이 애잔하다. 연년생 동생을 보느라 어리광 시기가 짧았을 이 녀석. 떼쟁이 시기를 성에 차지 못 하게 짧게 보냈던 연준은 또래 아이들보다 양보도 배려도 잘하는 편이다. 엄마의 마음에는 안심이 없나 보다. 비 오면 양산 팔러 나간 아들 걱정, 해 뜨면 우산 팔러 나간 아들 걱정. 엄마의 마음은 이런 것이다. 남들은 어른스러운 연준을 칭찬하지만, 연준이 자기 것을 챙기는 약삭빠름이 없어서 늘 아쉽다.                        

 연준 성격이 이런 데는 경희도 한몫했다. 경희는 다른 욕심은 별로 없는데, 유난히 첫째 아이인 연준에게만은 예민해지는 편이다. 연준 육아서 방식대로 FM으로 자란 아이이다.

 연준아, 틈새 시간을 이용해야 해. 학원 가기 전에 학교 숙제를 미리 해놓으렴. 아침 등교 전 시간을 이용하면 낮 시간이 여유롭잖니! 늘 시간관리가 가장 중요한 거야. 틈새시간을 놓치지 마라. 영어학원 숙제는 했니? 이제 할 일이 뭐가 남았지?” 학원 차량 시간이 다가오자 다급해진 경희는 따발총이 된다. 다다다다...

틈새시간을 이용해, 하루 분량 공부 중 하나라도 시켜놓아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연준이가 잠시 말이 없다.

 연준아, 네 생각을 당당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해. 왜 네 생각을 얘기하지 못하는 거니?”

 , 아니... 잠깐 생각 중이었어요. ~ 학교 숙제해놓고 학원 갈게요.” 경희 말에 거의 YES인 연준이는 역시나 숙제를 마쳐내고 집을 나선다.


왜일까? 별다른 일이 없었다. 정말 아무런 일이 없었다. 오늘따라 연준이의 어깨가 지쳐 보인 것 외에는... 연준의 표정에 웃음기 적어진 것이 이제야 보인 것 외에는... 연준이가 주인 손에 길들여진 정원수같이 보인 것 외에는... 왜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몰려온 것일까.

연지야, 오빠도 힘들겠다. 그지?” 우두커니 11살 연준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늘 보던 앞모습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첫째인 데다 늘 의젓했던 터라 큰 아이처럼 여겼는데, 그날따라 연준의 뒷모습이 영락없는 작은 아이였던 것이다. 이제 갓 10살을 넘기고 애기 티를 조금 벗은 작은 아이.


엄마, 나는 맨날 3학년이고 싶어. 오빠 보니까 4학년이 되기 싫어요. 4학년이 되면 학원도 많이 다니고 공부도 많아지잖아요!” 연지의 말에 경희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이들이 유년 시절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싶어서...   

잠시 경희의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동네방네 쏘다니며 친구들과 이것저것 놀이를 만들어 내고, 찾아던 그 시절. 어쩌면 경희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걱정 없이 행복했던 시절.

그런데 학교 다녀오면 학원 가고, 숙제하느라 바쁜 요즘 학생들을 생각하니 등줄기가 싸늘해진다. 가장 순수해서 가장 천진하게 놀 수 있는 이 시절, 이 아이들의 기억은 학원 추억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곧 중고등학생이 되면 입시 교육의 치열함에 놓일 테고, 대학생이 되면 취업전쟁으로 피로해질 아이들의 인생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경희는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손을 잡고 함께 있던 연지가 보이질 않는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피니, 연지가 저만치 뒤에 화단을 들여다보고 있다.

 연지야, 깜짝 놀랐잖아.” 경희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조용해 주세요. 나비가 자고 있어요!”한다.

경희는 연지의 모습 속에서 6살 연준의 모습을 떠올린다. 놀고 또 놀아도 지치지 않던 에너자이저 연준이. 6살 연준이의 해맑던 얼굴과 학원차량에 올라타던 얼굴이 오버랩된다. 경희는 착잡하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연준이를 마중 나갔다. 저만치 연준이가 보인다. 경희는 아이를 재미있게 해 주려는 생각에, 깜짝 놀래켜 주려고 살금살금 뒤로 다가갔다. 그 순간,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만다. 친구 진현이와 걸어오며 나누는 대화 때문이었다.

 연준아, 너 수학 문제집 몇 쪽까지 풀었어?” 하며 이어지는 대화는 문제집을 어디까지 풀었는지 서로 경쟁하듯 비교하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다.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매는 듯한 느낌에 몇 차례나 사로잡힌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행복한 거 맞나? 행복이 물리적 지수로 정해진다고 여겼나... 그런 시대적 흐름에 좀비처럼 의식 없이 따라다녔던 것인가.’

이 날 경희는 연준의 학원 가방을 집에 내려놓고 숙제를 시키지 않는다.

연준아, 나가자!”

어디를요?‘

초여름이잖아! 뒷산에 가보자. 개구리랑 도롱뇽이 알을 낳을 계절이야.”

연준의 표정이 환해진다. 산에 오르며 한 마리 토끼처럼 껑충거리는 아이를 보자니, 경희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연준아, 가만 보니까 우리 연준이가 엄마보다 더 바쁘고 열심히 사는 것 같아. 그래서 고맙고 미안해...”

그날 저녁은 시답잖은 이야기로 수다도 떨고, 도롱뇽 알을 건지느라 조마조마했던 이야기도 나눈다. 보드게임도 하며 간만에 저녁 시간이 기분 좋은 소리로 시끌시끌하다.


다음날. 아이들 하교시간이 다가오자 경희는 샌드위치 간식을 만든다. 이번에는 도시락으로 싼다. 아이들과 뒷산에서 올라 먹을 간식을. 경희는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유년시절과 연준이를 낳았을 때인데, 내게 가장 큰 행복을 선물한 아이에게 나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선물하지 못하고 있구나. 무던하고 잘 따라주던 연준이서 그저 공부를 밀어붙이느라 아이의 얼굴을 보질 못 했구나.’

경희와 아이들은 오늘도 뒷산에 오른다. 이들의 발걸음은 더 이상 다급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엄마, 오늘은 어디까지 가요?” 아이들이 묻는다.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좋아! 너희가 행복할 수 있는 그곳까지만 가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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