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웅성 Oct 30. 2022

최고의 기억자, 최악의 해석자

자녀는 최고의 기억자, 최악의 해석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음공부를 할 때 상담경험이 많으신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다 보니, 원가족 내의 문제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만큼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이겠지만, 비단 그런 경우에만 국한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앙금들은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담의 과정에는 반드시 가계도나 어린 시절 기억이 포함된다. 그만큼 깊고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해라는 기제로, 정, 사랑으로 넘기며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부모도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한계성을 가진 채 부모가 되다 보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부모)과 개인(자녀)의 만남이기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얼마 전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이창훈 편을 보았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가족들을 과보호하는 이창훈은 철옹성 같았다. 그 확고한 과보호에 대한 신념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중학생 딸아이가 학교에서 롯데월드로 소풍을 가는데, 위험할 것 같아서 따라가려 했다고 한다. 매일 등하교를 아빠 차로 하고 있는 딸아이의 소원은 다른 친구들처럼 걸어서 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수다도 나누고 간식도 사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소박한 소원은 아빠의 확고함 앞에서 불가한 것이었다. 이창훈 입장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걸어서 5분이나 가야 하는 분식점을 아이들끼리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근거를 들어 이창훈을 이해시키고자 했던 오은영은 끝내 단호하게 치료가 필요할 만큼 심각하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믿어왔던 신념에 문제가 있다고 하자, 이창훈은 당혹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오은영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속에는 불안에 떨던 어린 이창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깊은 심연 속에 감춰져 있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 사람의 큰 줄기를 이룬 불안이라는 정서는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엄마는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기에, 초1부터 먼 길을 혼자 걸어 다니며 무서운 일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세상은 위험한 곳이고 아무도 본인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고 한다.

적당한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순기능을 갖지만, 지나칠 경우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하는 지나친 예민성으로 발현된다.


일례이지만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역기능적인 상황이 발생되는 것을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본다.

비교당하며 자라 열등감이 큰 사람, 칭찬받지 못하고 자라 칭찬에 인색한 사람, 인정받아 본 적 없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사람, 엄격한 부모로 인해 위축된 삶을 사는 사람, 폭력의 대물림을 겪는 사람, 지나친 보호를 받아 의존성이 큰 사람 등.

혀는 아픈 이를 건드린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들은 무의식 적으로 결핍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생존과도 연결되는 강력한 존재이기에 아이는 사랑과 보호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백지상태의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남긴 자취는 그대로 새겨질 것이고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최고의 기억자에게 새겨진 기억은 최악의 해석이 적용되어 사춘기 시절 이후부터 반항과 불목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자녀도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면서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에 했던 해석에는 부모의 상황, 입장에 대한 공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상황을 겪으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그제야 부모를 좀 더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몇 마디 말로 풀어낼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다.

미워할 수는 없고, 사랑하기에도 아픈 몸에 난 흉터를 바라보는 마음 같기도 하다.

이미 생긴 과거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달라질 수 있는 건 그것을 바라보는 지금의 태도이다. 최악의 해석자로 머문다면 어린 시절에서 독립해낼 수 없다.

누군가의 손길과 관심이 없으면 쉽게 시들어버리는 여린 허브가 아닌, 태풍과 추위에도 나이테를 늘려가는 우뚝 솟은 나무가 되기 위해 내 안에 잔존해있는 부정적인 기억과 해석들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너무도 많이 들어 식상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태어난 것은 선택이 아니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선택이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일당백집사를 보며 생각해보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하고픈 한마디에 대해.

얼기도 녹기도 하며 나의 땅을 단단히 다지고, 고통 속에서 깊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고, 넓고 깊어진 눈으로 세상과 소통하다 마지막 순간에는 편안한 한 마디를 남기며 편안한 미소를 짓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를 채우고 있는 부정적인 해석들을 하나하나 다시 만나볼 필요가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만 편안하면 좋겠다.


한 줄 요약: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재해석하는 것은 좀 더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움? 오지랖? 투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