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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Nov 10. 2022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망각은 때로는 선물처럼 다른 세계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는 한다. 많은 것을 잊어야 하고, 잊어야 살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만난 모든 풍경을 다 기억할 수도 기억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매일의 잠은 하루의 기억을 정리하고는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는 순간이 있다. 백 세가 다 되어가시는 외할머니는 나를 보고 "누꼬?"하고 기억을 더듬으신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는다는 건, 겨울 앙상한 숲길을 걸으며 찬란했던 가을 숲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스산한 일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미술관 나들이, 소풍처럼 찾던 씨네큐브, 음악과 함께 아침을 여는 시간, 나를 옮겨내던 시, 분기별로 한 번씩은 들렀던 정동길과 교보문고, 가을이면 들르던 삼청동 은행나무길, 분기별로 찾아보던 공연, 봄날 풀숲에 쑥 찾듯 재미를 주던 연남동과 혜화동 골목, 사계절 언제나 좋은 서울 시립 미술관.

몇 년간 잊고 살았다. 나를 풍요롭게 했던 것들을.

언 강물에 금이 가듯, 스산하고 마른 가슴에 쨍 소리가 났다.

'아 맞다. 내가 잊고 있던 것들'

이제 다시 하나하나 찾아보려 한다.


그렇게 뒤적여 오랜만에 혜화동을 향했다. '빨래'라는 뮤지컬을 보았다. 각자의 어려움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다양한 세대가 주인집 할머니, 셋방 사는 세입자,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인 세입자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장애를 가진 딸의 기저귀를 40년 동안 빨며 살아온 주인집 할머니는 딸보다 하루만 더 살기를 소원한다. 동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는 희정엄마는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데, 형편은 늘 쪼들리고 마음은 늘 외로워 남자를 찾는다. 허구한 날 남자문제로 지지고 볶기도 한다. 문학소녀를 꿈꾸며 상경해 대형서점에 취직한 고졸사원 나영의 생활은 막힌 벽 앞에 선 듯 막막하고 직장생활은 고달프기만 하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아 돈을 벌기 위해 무지개 나라라는 한국을 찾은 몽골청년 솔롱고는 나날이 쌓여가는 임금체불과 억울한 일들에 힘겹기만 하다.

이들의 막막하고 힘겨운 시간들을 버티게 해주는 빨래. 먼지와 얼룩이 사라지는  빨래처럼 새 옷을 입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은 웃고 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희망을 노래한다.


https://youtu.be/U1j-dA_Tp5A



생을 살아내는 사람의 모습은 늘 애처롭지만 아름답다. 그래서 많이 접한 스토리지만 보는 사람에게 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에 상투적인 희망 이어도 따뜻한 감동과 힘을 주어 가치로웠다.

하지만 몇 년 만에 뮤지컬을 보는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스토리 자체보다 더 강력했다. 고단하고 힘겨워도 희망을 갖고 오늘을 살아내는 스토리를 연기하는 배우들, 그들은 바로 그 무대 위에서 그 스토리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배우들은 모두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어딜 가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더 많다. 공연이 절정을 달리고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에는 3시간을 매번 같은 대사와 같은 연기를 하며 공연할 그들의 피로가 애처로웠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여도 똑같이 반복되는 일에 매너리즘도 슬럼프도 올 테고, 너무 하기 싫은 날도 있을 테고, 몸이 안 좋은 날도, 가족이나 연인으로 인해 마음이 안 좋은 날도 있을 것이고, 극단도 조직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조직 내 갈등들에 마음 상하는 일도 있을 텐데. 무대 위에서 자신의 개인사는 뒤로 하고 깔깔깔 웃어야 하고 배역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3시간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이 그러하듯, 돈 버는 일이 그러하듯 저들도 참 애처로웠다. 춤추며 노래하고 푼수처럼 숨 넘어가게 웃어젖히는 희정엄마 역할을 한 배우의 모습을 보니 특히나 더 애처로웠다.


공연을 보고 귀가하는 길에 남편에게 이런 소회를 전하니

남편 왈, "당신이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거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깜짝 놀랐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나이만큼 경험이 체화되다 보니 살아내는 모든 사람들의 애환에 더 마음이 가고, 버거킹 직원도 베스킨라빈스 직원도 대견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드는 건, 대체로 조카 보듯 이모 고모의 마음으로, 자녀 보듯 엄마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서인가 보다.

주름은 늘고 탄력은 줄어든 피부와 늘어가는 흰머리, 뒤돌아서면 까먹는 건망증, 변화와 도전이 조심스러워지는 마음, 밤 운전이 힘들어지고 책을 볼 때 돋보기를 써야 하는 것에서만 나이를 느끼곤 했는데, 새로운 영역에서 이렇게 또 나이 듦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세상을 좀 더 산 선배다운 삶을 살아야겠구나, 트렌드를 쫓기보단 지혜롭게 해석하는 시야를 가져야겠구나, 그렇게 내 나잇값을 하며 살아야 내가 살아온 시간들에 보답할 수 있겠구나.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기보다 이만큼 성장해온 나를 응원하고, 주변과 나를 나눌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고 조용한 마음 새김을 해본다.


잊고 지내던 것들, 나를 풍요롭게 해 주던 것들을 찾아 나선 여정에서 나는 그 시절과는 또 다른 감회와 낭만을 만난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주는 서글픔은 잊고, 그 시간에 아로새겨진 기억과 나를 풍요롭게 하고 무르익게 한 정취는 삶의 지혜 속에 녹여 잊지 않도록 새기는 편이 좋겠다.




한 줄 요약: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나이 듦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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