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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Nov 03. 2022

빛과 그림자

별이 길을 인도하는 시간, 하늘을 올려다본다.

잿빛 구름이 낀 밤하늘은 보랏빛이다. 밤하늘에서 짙은 보랏빛을 보면 다음날 일기는 흐림이나 비.

오늘 하늘은 푸른 군청빛이다. 내일의 날씨는 화창하겠구나.  마음은 이미 내일의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 물든다. 반쪽짜리 하얀 생크림 케이크 같은 달은 구름을 배고 편안한 각도로 누워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을 걸어 발걸음도 가볍다.


길게 난 가로수길을 걷다 보니, 달빛만큼 따스한 가로등이 나와 낙엽만이 수북한 길을 비춘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 갑자기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데, 나를 비추는 세 개의 불빛이 세 개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그렇게 나는 세 개의 사람이 되었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쪽달처럼, 그림자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림자를 잡으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빛과 그림자.

아름다운 밤을 걸으면서도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처럼,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와 그림자'로 존재한다. 음양의 조화라는 말이 있듯이, 쌍두아처럼 떨어질 수 없다면 나는 나의 그림자를 잘 데리고 살아야 한다.


앤드류 솔로몬은 한낮의 우울이라는 책에서,

「나는 고통받는 능력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평생 막연한 슬픔 속에서 살 것이다. 우울증을 안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의 우울증을 통해 배움을 얻는 사람들은 우울증 체험으로부터 특별한 도덕적 깊이를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의 고통의 상자 밑바닥에 고이 놓여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일찍이 오비디우스는 말한다 "이 고통에 이른 것을 환영 하노라. 그대는 이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리니."」라고 고통을 예찬했다.


그림자를 삶의 어둠 내지 고통에 빗대어 본다면, 나는 "이 그림자를 환영 하노라. 나는 이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리니."라고 외치고 싶다.


그림자를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림자를 바라보지 않거나 빛을 머리 위로 끌어오는 것.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햇빛만 바라본다면, 시력을 잃게 된다. 신체기관으로서의 시력상실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영혼의 시력 상실일 것이다. 내면의 시력상실은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나는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림자를 피하지 않은 채 빛을 당기는 방법은 어떨까.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애틋해하고 위로하고 애처로워하되 사랑한다면. 애틋하여 안아주고, 위로하기 위해 나를 위한 선물을 하고 애처로워 쓰다듬어 준다면.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보여주며 그림자를 사랑할 때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영적 키가 훌쩍 커지고 키가 자란 만큼 그림자는 짧아지는 것이다.

좋은 것들을 찾는 마음은 빛을 당기는 마음이다. 나의 우주를 에워싼 파장은 그 빛으로 온도 올고, 더 큰 빛을 끌어오는 인력이 작용한다.

빛을 당긴다는 것은 마음속에 빛이라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다. 눈앞에 이정표는 곧 다가올 목적지를 안내하는 것이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정표 상의 거리가 2억만 리일 수도 2천 킬로일 수도 200 킬로일 수도 있다. 거리에 연연하지 않고 방향만 따라가면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그때 빛은 머리 위를 비치고 있을 것이다.


삶은 그림자의 크기를 줄이고 영혼의 키를 키우는 과정이 아닐까. 굴곡진 길 위에서도 빛을 끌어당기기 위한 몸부림끝끝내 자신이 빛이 되게 할 것이다.


조용한 밤, 산책길에서 수많은 빛을 느껴본다. 하늘에도 땅에도 별이 빛났다. 별빛을 모으는 자들의 마음은 별빛보다 아름답다. 



https://youtu.be/ilaAogPWr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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